[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5> ‘영원히 기억될 수밖에 없는…’ 청송 안덕면의 추모재, 영수당, 일신재

  • 박관영
  • |
  • 입력 2017-10-18   |  발행일 2017-10-18 제13면   |  수정 2021-06-21 17:20
높지도, 낮지도 않은 곳…온화하지만 자신에겐 엄했던 사람들이 살았다
20171018
청송군 안덕면 문거리에 자리한 추모재 전경. 추모재는 월성이씨 청송 입향조 이정견의 손자인 송와 이종윤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재사다.
20171018
일신재는 안동권씨 청송 입향조 직장 권명이의 11세손인 일신 권후준의 정자다. 권후준은 통덕랑을 지낸 권성시의 장남으로 문행과 덕망이 높았다고 한다.
20171018
영수당은 18세기 청송에 살았던 안동권씨 권방이 이름을 붙인 정자다. 청송군지에 따르면 권방은 선비의 도를 닦고 의를 행해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던 인물이다.

 

 

글월 문(文)에 살 거(居)인 문거리(文居里). 문인이 많이 살았다는 마을이다. 청송의 남쪽 면봉산과 연점산 사이에 부드러운 능선으로 둘러싸인 남북으로 긴 산골로 둘러선 산등성이는 너무 멀지도, 너무 가깝지도, 너무 높지도, 너무 낮지도 않다. 북쪽 정수리에는 길안천이 차갑게 흐른다. 선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준엄한 땅이다. 이곳에 오래 기억되고 있는 몇몇 사람이 있다. 기억됨은 훌륭한 문장을 남겨서가 아니었다. 그들은 선하고 부드럽고 따뜻하면서도 준엄한 땅과 하나여서 영원히 상기될 수밖에 없는 이들이었다. 


문인들이 많이 살았다는 文居里 추모재
월성이씨 입향조 손자 이종윤 기리는 곳
5백년이 지나도 수수하고 단정한 모습

안동권씨 청송입향조 11세손 권후준
매일 새로워진다는 뜻의 일신재 세워
물욕 버린듯 방 한 칸에 벽장이 전부

권후준 후손 권방이 이름붙인 영수당
자신을 선하게 한다는 뜻의 ‘독선재’
대문 현판에 굳은 다짐처럼 쓰여있어


 

#1. 문거마을의 추모재

문거리가 시작된 문거마을, 고샅길은 공사 중이었다. 두리번두리번 오래된 기와지붕을 찾는다. 골짜기 안쪽 멀리에 하늘을 가로지르는 문거대곡지의 푸른 둑이 보이고, 그 아래 다붓하게 모인 기와지붕들을 발견한다. 어떻게 가면 될까 궁리를 하며 따가운 햇살 속을 무작정 직선으로 걷기 시작한다. “이쪽으로 와도 돼요.” 공사를 하던 아저씨가 큰 소리로 손짓해 마을을 에둘러 골짜기로 나아가는 길을 열어주신다. 어떻게 아셨을까, 저 먼 저수지 아래 추모재(追慕齋)로 간다는 것을. 길가 논은 그런대로 넉넉하고 노는 땅 없이 야무지게 밭들이 일구어져 있다. 산뜻한 골짜기다.

추모재는 송와(松窩) 이종윤(李從允)을 추모하기 위해 만든 재사다. 이종윤은 월성이씨 청송 입향조 이정견(李廷堅)의 손자로 입향 이래 가장 가문을 빛낸 인물이라 한다. 일찍이 과거에 급제해 사간원 정언과 예조좌랑과 정랑, 시강원 보덕, 제주목사 등의 관직을 거쳤다. 직언과 충언을 사명으로 여겼고 환관들과 내수사의 농간 등을 탄핵했으며 조정간신의 처벌에 힘쓴 인물이라 한다. 또한 매사에 청렴하고 신중했고 예를 중요하게 여겼으며 백성을 자식처럼 사랑했다고 전해진다. 이종윤은 만 60세가 되던 1490년 제주목사로 부임해 뛰어난 통치력을 보여 주었는데, 2년 뒤 임기가 만료되자 제주도민들의 간청으로 유임된다. 재임 중이던 1495년 제주에서 생을 마쳤고 고향 청송으로 운구되어 묻혔다.

옛날에는 재사를 마을 입구에 지었는데 현재의 것은 1900년 무렵 묘소가 바라보이는 곳에 지은 것이다. 추모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두 칸은 대청으로 열었고 양쪽은 방이다. 전면에는 반 칸 툇마루를 놓고 머름 형 평난간을 둘렀다. 오른쪽에는 화장실로 보이는 작은 맞배지붕 건물이 있다. 경역은 기와를 얹은 흙돌담으로 살뜰하게 구획했고 담장 밖 오른쪽에 3칸 규모의 주사가 있다. 추모재는 봉긋한 야산 아래 저수지를 오른쪽에 두고 왼쪽으로 마을을 음시한다. 정면은 평온한 구릉이다.

마을의 산 아래에는 천년 된 암자가 있었다 한다. 이종윤이 젊었을 때 고을의 사우들과 함께 그곳에서 글을 읽었다 하여 ‘이씨산방’이라 불렸다. ‘추모재강당기’에 보면 옛날의 재사가 300년이 넘는 시간 동안 황폐해지자 후손들이 산 아래에 작은 강당을 지어 강학소로 삼았다는 내용이 있다. 산방에서 강당으로, 그리고 추모재로 이어온 것이 아닌가 싶다. 후손들은 17C 중엽까지 청송에서 세거하다 그의 증손대에 타지로 흩어져 일부만이 남게 된다. 재사는 특별한 것 없이 수수하고 단정하다. 콘크리트 기단과 말쑥한 담장은 근래의 보수단장을 의미한다. 그가 세상을 떠난 지 500년이 훨씬 지났다. 추모재는 상좌에 홀로 있으나 떠나지 않은 따스한 손들을 맞잡고 있는 듯 온화하다. 정직하게 주름진 수수한 손들을 생각한다.



#2. 문거리 석정마을의 영수당

문거마을에서 달밭우질길을 따라 북쪽으로 오른다. 문거2리를 지나 석정길로 접어들면 문거3리 석정(石井)마을이다. 낮게 드리운 연점산 자락을 바라보는 길안천변의 좁은 평지에 열두 가구 정도가 사는 작은 마을이다. 옛날에는 석평(石坪)이라고도 했다. 천변에 평평한 바위라도 있었을까.

이곳을 청송 제일의 경치라 했던 이가 있었다. 그는 이곳에 정자를 짓고 때로는 구부려 바라보고 때로는 우러러 보고, 개울과 산에서 휘파람 불고 시 읊으며 세간의 모든 일을 잊고 즐거움과 슬픔이 무슨 물건인지 모르고 살았다 한다. 그는 말했다. ‘부족함이 없는데 무엇을 바라겠는가.’

그는 정자의 이름을 ‘영수당(嶺秀堂)’이라 했다. 빼어난 산줄기를 바라보는 집이다. 청송의 하 많은 절경 중에 자신이 바라보는 것을 제일이라 여겼던 이, 그는 안동권씨(安東權氏) 권방(權滂)이다. 군지(郡誌)에는 선비의 도를 닦아 의를 행하고 자신에게는 엄하여 사람들의 모범이 되었던 인물이라 기록되어 있다. 강와(剛窩) 임필대(任必大)가 기(記)를 쓰고 천사(川沙) 김종덕(金宗德)이 시를 선사했으니 권방은 18세기 사람이다.

영수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 대청방이 있고 양쪽은 협실이며 전면은 반 칸 툇마루다. 정자는 시멘트 벽돌담에 둘러싸여 있고 마당에는 1980년에 세운 유정비(遺庭碑)가 서 있다. 반듯한 대문에 독선재(獨善齋) 현판이 걸려 있다. 날 선 글씨체다. 흔히 ‘독선’은 부정적으로 해석된다. 그러나 ‘자신의 한 몸을 선하게 한다’는 뜻으로 다가온다. 부족함도 없고 바라는 것도 없이, 자신에게 엄했던 이의 독선이지 않은가.

#3. 장전리 못골의 일신재

석정마을 입구에 남쪽 골짜기에서부터 흘러온 개천이 있다. 천을 따라 좁은 길을 조심조심 오르면 석정지가 있고, 저수지 가장자리를 아슬아슬 따라 오르면 다시 거친 산길이 시작된다. 못골이라 불리는 골짜기다. 현재 행정구역상으로는 안덕면 장전리에 속하지만 이전에는 석정리였다. 돌아나가고 싶은 마음이 스멀스멀 들 즈음 집 한 채가 나타난다. 출타 중인 주인 대신 강아지 네댓 마리가 조르르 따르며 바지 자락을 가볍게 깨물다 물러난다. 끙끙대는 소리를 뒤로하고 빛 현란한 짧은 숲길을 다시 지나면 산으로 둘러싸인 밝은 땅이 열린다.

풀 나무의 향기가 궁륭을 그리는, 이름 지을 수 없는 투명한 공간. 부드러운 흙과 거친 풀이 하나가 되어 평화로운 입김을 내뿜는 땅. 그 속에 정자가 있다. 높이 자란 풀들에 반쯤 가려진 정자는 층층이 쌓인 빛 속에 이마를 드러내고 있었다. 기억을 모르는 순결한 이와 해후한 듯 설레었다. 정자는 일신재(日薪齋)다. 옛날에는 일신당이라 했다. 정면 2칸 측면 2칸의 우진각지붕 건물로 가운데 한 칸 방에 달아낸 벽장 하나와 사방 좁은 툇마루가 전부다.

일신재는 안동권씨 청송 입향조 직장(直長) 권명이(權明利)의 11세손인 일신(日薪) 권후준(權后準)의 정자다. (영수당의 주인 권방은 그의 후손이다.) 권후준은 통덕랑을 지낸 권성시(權聖時)의 장남으로 문행(文行)과 덕망이 높았다는 기록이 있다.

일신이란 매일 새로워지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사람은 태어날 때부터 밝음과 덕이 있다고 믿었다. 그리고 그러한 본성을 흐리게 하는 것을 물욕이라 여겼다. 움직이나 고요하게 있으나 간단없고 쉼 없이 물욕을 버리는 것, 그로써 밝음과 덕에 이르는 것, 그렇게 새로워지는 것을 일신이라 했다. 그는 게을리하지 말고, 홀로 방에 있더라도 잊지 말며, 모든 사람을 새롭게 하라고 당부한다. 일신재는 영원히 오늘일 것처럼 보였다. 나무랄 데 없는 완성이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청송군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