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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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6 07:49  |  수정 2017-10-16 07:49  |  발행일 2017-10-16 제18면
[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하늘 우러러 한 점 부끄러움 없길

‘어머니/ 누나 쓰다 버린 습자지는/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습자지에다 내 버선 놓고/ 가위로 오려/ 버선본 만드는 걸// 어머니/ 내가 쓰다 버린 몽당연필은/ 두었다가 뭣에 쓰나요?/ 그런 줄 몰랐더니/ 천 위에다 버선본 놓고/ 침 발러 점을 찍곤/ 내 버선 만드는 걸’ (-윤동주, ‘버선본’)

‘넣을 것 없어/ 걱정이던/ 호주머니는// 겨울이면/ 주먹 두 개 갑북갑북’ (-윤동주, ‘호주머니’)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어제도 가고 오늘도 갈/ 나의 새로운 길// 민들레가 피고 까치가 날고/ 아저씨가 지나고 바람이 일고// 나의 길은 언제나 새로운 길/ 오늘도… 내일도… // 내를 건너서 숲으로// 고개를 넘어서 마을로’ (-윤동주, ‘새로운 길’)

‘처마 밑에/ 시래기 다래미/ 바삭바삭/ 추워요.// 길바닥에/ 말똥 동그래미/ 달랑달랑/ 얼어요.’(-윤동주, ‘겨울’)

우리 애기는/ 아래발치에서 코올코올,// 고양이는/ 부뚜막에서 가릉가릉,// 애기 바람이/ 나뭇가지에서 소올소올,// 아저씨 해님이/ 하늘 한가운데서 째앵째앵.’(-윤동주, ‘봄’)

‘지난밤에/ 눈이 소오복히 왔네// 지붕이랑/ 길이랑 밭이랑/ 추워한다고/ 덮어주는 이불인가봐// 그러기에/ 추운 겨울에만 내리지’ (-윤동주, ‘눈’)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울 언니 바닷가에서/ 주워온 조개껍데기/ 여긴 여긴 북쪽 나라요/ 조개는 귀여운 선물/ 장난감 조개껍데기/ 데굴데굴 굴리며 놀다/ 짝 잃은 조개껍데기/ 한 짝을 그리워하네/ 아롱아롱 조개껍데기/ 나처럼 그리워하네/ 물소리 바다물 소리’ (-윤동주, ‘조개껍질’)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우러/ 숲으로 가자// 그믐달 반디불은/ 부서진 달조각/ 가자 가자 가자/ 숲으로 가자/ 달조각 주우러/ 숲으로 가자’ (-윤동주, ‘반디불’)

‘외양간 당나귀/ 아-ㅇ 외마디 울음 울고/ 당나귀 소리에/ 으-아 애기 소스라쳐 깨고// 등잔에 불을 다오/ 아버지는 당나귀에게/ 짚을 한 키 담아주고/ 어머니는 애기에게/ 젖을 한 모금 먹이고/ 밤은 다시 고요히 잠드오’ (-윤동주, ‘밤’)

‘빨랫줄에 두 다리를 드리우고/ 흰 빨래들이 귓속이야기 하는 오후/ 쨍쨍한 칠월 햇발은 고요히도/ 아담한 빨래에만 달린다’(-윤동주, ‘빨래’)

교토 도시샤대학 교정 성당 뒤쪽에는 윤동주 시인과 정지용 시인의 시비가 나란히 있습니다. 이 학교는 윤동주 시인이 ‘봄비가 속살거리’는 ‘남의 나라’ ‘육첩방’에서 ‘땀내와 사랑내 포근히 품긴/ 보내 주신 학비 봉투를 받아/ 대학 노트를 끼고/ 늙은 교수의 강의 들으러’ 다닌 곳입니다. 마음의 결이 누구보다 여린 시인은 ‘어린 때 동무를/ 하나, 둘 죄다 잃어버리고/ 나는 무얼 바라/ 나는 다만, 홀로 침전하는 것일까?’ 되뇌며 이 시들을 썼을 터입니다. 단언컨대 수많은 예술 장르 중 특히 시는 마음의 결이 두꺼운 사람은 쓸 수 없습니다. 설혹 썼다 하더라도 읽는 이들의 섬세한 결에 부딪혀 두 번 다시 읽히지 않는 시가 될 것입니다. 박미영<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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