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영양 감천마을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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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3   |  발행일 2017-10-13 제36면   |  수정 2017-10-13
비탈진 언덕 따라 흙돌담 길도 넘실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다만 강물의 한 조각. 긴긴 시간의 잰 뒤척임은 볼 수가 없다. 눈앞의 평온한 물은 어느 때 몇 번의 뒤척임으로 돌아누운 것인가. 천천히 높아져서는 이내 까마득히 날 선 절벽, 오직 그것이 강물의 시간을 가늠해보는 척도일지니. 나무들은 기색을 살피며 벼랑에 뿌리를 내렸고, 사람들은 물가에 집을 짓고는 그리고 감사와 기원(祈願)을 담아 감천(甘川)이라 불렀다.

영양읍 남쪽으로 굽이지는 곳에 위치
400여년 前 터 잡은 낙안 오씨 집성촌
한가운데 44칸 한옥 ‘詩人 오일도 생가’

마을 안 삼천지 제방 따라 노송들 굼실
주변 종택 감호헌·사당 충효사·詩공원
마을 동남쪽 반변천 절벽엔 측백수림


◆ 감천마을 오일도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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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마을 안길. 흙돌담길이 부드럽게 울렁이고 삼천지 제방에 아름다운 소나무가 자라고 있다.

해 뜨고 달 뜨는 일월산에서 낙동강의 동쪽 원류인 반변천(半邊川)이 시작된다. 동국여지승람에는 대천(大川)이라 기록되어 있다. 태백산맥의 남북 방향을 따라 비교적 깊은 협곡을 이루며 감입곡류 하는데, 영양읍의 남쪽에서 상현달처럼 굽이지는 곳에 감천마을이 자리한다. 마을은 낙안오씨 집성촌이다. 400여 년 전 통정대부를 지낸 오시준(吳時俊)이 처음 터를 잡았다 한다. 구릉진 땅의 형세를 그대로 따라 집들이 들어서 있어 기와를 얹은 흙돌담 길이 부드럽게 울렁인다.

마을의 한가운데에 44칸 한옥이 있다. 비교적 으리으리한 느낌을 주는 칸 수지만 칸들이 조막만 해 그리 크지는 않다. 솟을대문을 가진 5칸 대문간이 꽃과 나무들에 안겨 있다. 마당에 트럭 한 대가 서있다. 한 켠의 작은 비닐하우스 안에는 땅콩이 펼쳐져 있고, 담벼락을 따라 파와 토란 등이 싱그럽게 자라고 있다. 지금도 사람이 사는 집이다. 어디에나 사람의 자취가 가득하다. 이곳에서 일제강점기의 시인 오일도(吳一島)가 태어났다.

오일도의 본명은 희병(熙秉)이다. 1901년 감천마을에서 태어나 14세까지 마을의 사숙에서 한문 공부를 했다. 이후 영양보통학교, 경성제일고등보통학교, 일본 도쿄의 리쿄대학 철학부에서 공부했다. 그는 대학 시절부터 시를 썼고 25년 ‘조선문단’ 4호에 시 ‘한가람백사장에서’로 등단했다. 아버지 오익휴는 천석의 거부로 오일도는 넉넉한 가풍 속에서 자랐다고 한다.

생가는 고종 원년인 1864년 오일도의 조부인 오시동(吳時東)이 건립했다. 전체 ‘ㅁ’자형으로 대문에서 정면을 보면 안채로 들어가는 문을 중심으로 오른쪽에 사랑채가 있고 왼쪽에 작은 글방이 있다. 오일도가 공부했던 방이다.

“작은 방 안에/ 장미를 피우려다 장미는 못 피우고/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모가지 앞은 잊어버려라/ 하늘 저 편으로 둥둥 떠가는 저녁놀/ 이 우주에 저 보담 더 아름다운 것이/ 또 무엇이랴/ 저녁놀 타고 나는 간다/ 붉은 꽃밭 속으로/ 붉은 꿈나라로.”(저녁놀 전문) 그의 작은 방 앞에서, 장미를 피우려다 못 피운 그를 떠올린다.

◆ 오일도 詩공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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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마을 오일도 시공원 앞의 삼천지. 오른쪽에 보이는 기와지붕이 낙안오씨 사당인 충효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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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마을 오일도 생가. 1864년에 건립된 44칸 건물로 경북 문화재자료 제248호로 지정되어 있다.

마을 안쪽에는 연못이 있다. 삼천지라 하는데 그 뜻은 알지 못한다. 연못에는 철도 모르고 한 송이 연꽃이 피어 있고 아직 잎 푸르다. 동쪽 제방을 따라 노송들이 굼실굼실 가지를 뻗고 있다. 깜짝 놀랄 만큼 멋있는 나무들이다. 제방 길은 근래에 정비했지만 나무들은 아주 오래 마을과 함께한 듯하다. 연못의 오른쪽 가장자리에 낙안오씨 종택 감호헌(鑑湖軒)이 있고 그 뒤에 사당인 충효사(忠孝祠)가 자리한다. 종택의 이름에서 삼천지의 시간 역시 오래겠단 생각을 한다.

연못 뒤쪽에는 오일도 시공원이 넓게 조성되어 있다. ‘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누른 포도잎’ ‘그믐밤’ ‘코스모스’ ‘가을하늘’ 등 그의 시를 새겨 넣은 바윗돌들이 올망졸망하게 펼쳐진 나지막한 둔덕들 가운데 서있다. 나태주 시인은 그의 시에 대해 “억센 항변과 암울한 시대를 한탄하는 시들”이라 했다.

입구에는 ‘지하실의 달’ 시비 옆에 책을 펼친 그가 앉아 있다. ‘지하실의 달’은 그의 유고시집의 제목이기도 하다. 오일도는 35년 2월에 사재를 들여 시 전문지 ‘시원(詩苑)’을 창간했다. 우리나라 최초의 시 전문지로 이후 우리 현대시의 발전 속도가 빨라졌다고 평가된다. 그는 많은 시인을 세상에 알렸지만 자신의 시집은 생전 한 권도 출판하지 못했다.

태평양 전쟁의 막바지 즈음에 그는 일제의 통제를 절감하며 낙향했다. 그는 절필하고 긴 칩거에 들었다. 광복 후 다시 상경한 그는 ‘시원’의 복간을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뜻을 이루지 못했고 우울로 인한 폭음으로 나날을 보냈다. 결국 간경변증이 그를 덮쳤고 그로 인해 죽음을 맞았다. 45세였다. 책을 읽고 있는 그는 여전히 젊다.

◆ 감천리 측백나무 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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감천리 측백나무 숲. 반변천의 절벽에 자생하며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다.

감천마을의 동남쪽 천변에는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측백나무 숲이 있다. 반변천변의 절벽 바위틈에 뿌리를 내린 숲이다. 측백나무는 생김새가 아름다워 주로 집과 길을 단장하는 데 많이 쓰인다. 우리나라에는 측백나무 자생지가 극히 드문데, 절벽의 바위틈에 뿌리를 내리고 숲을 이루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측백나무는 중국이 원산지다. 우리나라에 자생하는 측백나무는 중국 도입설에 대항할 수 있는 중요한 학술적 증거가 된다.

숲은 희귀한 모감주나무, 털댕강나무와 함께 어우러져 있다. 깊은 물과 높은 절벽이 나무들을 보호하니 사람의 손이 닿기 어려웠고, 그로 인해 귀하게 보존되었다. 나무들은 지름 10㎝ 내외에 높이 3~5m 정도로 날씬하고 천의 건너편에서도 신선함을 감식할 수 있을 만큼 생육 상태가 좋다. 옛날 이곳의 측백나무는 만병통치약으로 이용되기도 했다. 특히 측백나무 가지와 잎을 삶아 먹으면 부인병에 좋다는 소문이 나 멀리서도 구하러 오는 이가 많았다 한다. 그러면 마을의 힘센 젊은이가 허리에 새끼줄을 감고 한 손에는 낫을 들고 반변천을 헤엄쳐 건너 간신간신 절벽을 올라 꼭 필요한 만큼의 가지를 베었다.

지금 절벽의 맞은편은 캠핑장이다. 소나무와 느티나무가 숲을 이루는 아름다운 곳이다. 오늘도 몇몇 텐트가 정오가 넘도록 고요하다. 숲 속 어디에서나 절벽의 측백수림이 보인다. 단풍이 오면, 고요는 사라질까. 그때는 수런거림 속에서 한 편의 시를 읊어도 좋겠다. “내 연인이여! 좀 더 가까이 오렴/ 지금은 애수의 가을, 가을도 이미 깊었나니… 내 연인이여! 좀 더 가까이 오렴/ 지금은 조락의 가을, 때는 우리를 기다리지 않는다.”(‘내 연인이여! 가까이 오렴’ 일부)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중앙고속도로 안동 분기점에서 영덕 방향으로 가다 동청송, 영양IC에서 내린다. 31번 국도를 타고 영양읍 방향으로 가다 보면 왼쪽에 감천마을이 자리한다. 마을 안에 이정표가 잘 되어 있다. 31번 국도를 건너 천변으로 가면 반변천 너머 절벽의 측백수림을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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