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23] 10월영화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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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2   |  발행일 2017-10-12 제29면   |  수정 2017-10-12
일제청산 위해 만든 영화사…전속 女배우 모집 애먹어
201710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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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월영화공장은 영화제작에 앞서 이동연극단을 조직하여 각 마을이나 공장 등을 찾아다니며 공연을 하였다. (영남일보 1945년 11월7일자)

‘영화와 연극에 예술을 통해서 조선의 참다운 대중문화를 건설하기 위하여 맹활동 중인 10월영화공장에서는 오랫동안 봉건주의 밑에서 억울하게도 파묻혀 있던 우리 조선여성들에게 새로운 문화부문의 활동의 길을 열어주기 위하여 금반 순진한 여자동지를 모집하기로 되였다고 한다. ~채용된 연구생은 상당한 생활의 보장을 한다고 한다.~’(1946년 1월5일자)


광복 후 대구는 ‘최대 문화도시’
지역정체성 담고 대중 계몽 목표
마을 곳곳 찾아다니며 연극 공연
영주·봉화 수해복구 봉사활동도
나중에 조선문화영화사로 개명



10월영화공장에서 마음의 꾸밈이 없고 순박한 여자동지를 모집한다는 기사다. 여자동지는 여자연구생을 일컫는다. 여자연구생은 뭘까. 10월영화공장은 영화사다. 그렇다면 여자연구생은 여자 연기자로 보는 것이 자연스럽다. 말하자면 영화사 소속의 전속배우다. 괜찮은 대우를 내세우는 것으로 봐선 여자연구생을 구하기가 쉽지 않음을 짐작할 수 있다. 이미 그전에 한 차례 배우모집을 한 바 있지만 여자연기자를 구하는 데 실패한 것이다.

영화와 연극은 일제강점기부터 주민들에게 그나마 익숙한 장르였다. 방학이 되면 유학생들은 고국으로 돌아와 연극으로 계몽운동을 펼쳤다. 글자를 모르는 주민도 연극이나 영화를 보며 조국의 현실을 자각할 수 있었다. 당시 높은 문맹률은 광복 후에도 영화의 인기를 높이는 한 요인이 되었다. 더구나 연극·영화 같은 문화도시로서의 대구는 한강 이남에서 최고의 위상을 가졌다. 그 결실로 대구에서는 1945년 10월1일 10월영화공장이 탄생했다.

10월영화공장은 일본제국주의의 영화유산을 청산하고 근로대중을 계몽하려는 목표를 세웠다. 독립된 조국으로 뿌리를 내리고 주민들의 문화생활이 향상되도록 하는 데 이바지하겠다는 것이다. 이를테면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어 영화다운 영화를 만들겠다는 포부다. 영화사 설립에 광복 이전부터 영화나 연극운동을 벌였던 청년들이 다수 참여한 이유이기도 하다.

‘~대구에서 10월영화공장이라는 이름 아래 문화 부문의 일익을 담당한 영화의 제작 사명을 완수하고저 커다란 포부를 안고 힘차게 출발하였다. 그 공장에서는 제1착 사업으로 우선 영화 제작 전에 이동연극단을 조직하여 각 촌 부락에 공연을 개시하야 건국지도에 주력을 집중하자는 목표 아래~’(1945년 11월7일자)

10월영화공장은 창립하자마자 이동연극단을 조직한다. 영화의 경우 장비나 비용 면에서 준비과정이 길다. 따라서 동네나 공장으로 찾아가는 이동연극단을 먼저 만든 것이다. 대구역전과 전재민 제1수용소, 남선전기회사, 전매국, 동산병원 간호부숙사 등을 찾았다. 10월영화공장 부인동지회가 당시 인기공연이었던 신불출 만담회를 주최한 것도 같은 이유다.

10월영화공장은 그 후 문화영화 ‘고도경주’와 ‘싸우는 열차’ 같은 기록영화 제작에 나선다. 영주·봉화의 수해복구에도 투입된다. 10월영화공장은 10월영화사를 거쳐 조선문화영화사로 이름을 바꾸면서 다양한 형식의 영화제작으로 변화를 꾀한다. 지역의 역사와 문화영화 제작으로 눈길을 돌린 것이다. 대구경북의 문화와 지역의 정체성을 앵글에 담으려 했던 청년들의 흔적, 10월영화공장에 녹아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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