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어떤 건배사

  • 원도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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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1   |  발행일 2017-10-11 제39면   |  수정 2017-10-11

얼마 전 저녁 자리에서 전력산업에 종사하는 분들과 어울렸다. 막걸리를 반주로 건배를 하게 됐는데 그분들의 건배사가 특이해 기억에 남는다. 유행하는 건배사를 거의 다 꿰고 있다고 자부하는 필자에게도 이색적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그 건배사는 현 시대 상황을 반영하고 있었다. 그분은 선창으로 ‘자·전·거’를 할 테니 우리에게 ‘따르릉’을 후창으로 해줄 것을 요청했다. 그러면서 설명을 덧붙였다. ‘자·전·거’의 뜻은 ‘자랑스러운·전력인으로서·거듭나자’라고 강조했다. 그리고 ‘자·전·거’를 엄숙하고 절도 있게 외쳤다. 우리는 큰 소리로 ‘따르릉’ 했다.

신랄한 풍자와 재기 넘치는 건배사는 모임의 분위기를 좋게 하는 촉진제다. 알다시피 사회·정치·경제·문화 현상뿐 아니라 자연계 동식물, 심지어 미국 대통령 이름까지 동원돼 풍자와 위트가 가미된 건배사들이 인터넷에 넘쳐난다. 한국인의 탁월한 조어 능력이 다양한 건배사에서 그대로 드러난다. 이왕이면 건배사는 좌석 구성원의 면면과 분위기에 맞아야 한다. 필자는 ‘수신/제가’를 한동안 애용했다. 그 뜻을 ‘손 수(手) 몸 신(身), 손과 몸으로 때우는 일은/제가 하겠습니다’로 설명해주면 다들 즐거워했다. 이렇듯 건배사는 자리의 품격을 높이는 센스가 들어가면 금상첨화다.

새 정부가 환경친화적인 나라를 추구하면서 탈원전 정책을 밀어붙여 파장이 크다. 신고리 5·6호기의 건설 중단 여부를 결정할 공론화위원회가 여론조사에 들어간 가운데 한국 원전산업의 밀알이 돼 온 경주는 충격과 배신감에 휩싸여 있다. 탈원전 구상과 로드맵 과정에서 경주시민은 배제된 채 진행되고 있기 때문이다.

경주에는 국내 유일의 중수로 원전인 월성원전 1~4호기와 중·저준위 방폐장이 있다. 월성 1~4호기의 수명은 12년 후인 2029년이다. 또 경주에는 지난해 3월 이전한 공기업 한국수력원자력 본사가 있다. 전력산업 종사자들은 앞으로 어떻게 될지 불안하다. 한국전력 2만1천명, 한수원 1만2천명 등 계열사 포함 5만명이 넘는 인력이 전력생산 관련업에 종사하고 있다. 이들의 불투명한 앞날에 대한 고민이 ‘자전거/따르릉’과 같은 건배사를 탄생시킨 것이다. 전력인들의 고민이 해소되고 일들이 잘 풀려 이들의 건배사가 ‘이대로/영원히’로 바뀌는 날이 올 수 있을까?

원도혁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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