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영화 시나리오 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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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11 08:42  |  수정 2017-10-11 08:42  |  발행일 2017-10-11 제29면
[문화산책] 영화 시나리오 쓰기
김현정 <영화감독>

내가 첫 시나리오를 쓴 건 29세 때였다. 서울에서의 직장생활을 정리하고 대구로 돌아온 뒤, 하고 싶은 일을 다시 찾고 싶다는 마음이 컸다. 사춘기 때 쉽게 속마음을 털어놓지 못해서 오롯이 글만 써왔던 과거의 모습을 떠올리며 난생 처음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마음 먹었다. 하지만 수필이나 딱딱한 기술적 글쓰기와는 달리 허구적 세계를 그려야 하는 시나리오는 그저 막막했다.

서울에 있는 시나리오 학원을 찾아갔다. 기초반에 모인 사람들은 자신만의 멋진 시나리오를 완성하길 원했다. 당시 강사는 수많은 단편 시나리오를 주고 필사와 감상을 쓰게 했다. 수업을 듣는 대부분의 학생들은 ‘시나리오’라는 문법에 조금씩 익숙해졌다. 몇 주가 지난 뒤에야 시나리오를 쓰는 과제를 받았다. 나는 수업 때 들었던 기초적인 작법에 시나리오 작법 책을 추가로 공부하며 무작정 글을 써나갔다.

이런 식으로 이론의 작법을 익히고 시나리오를 썼기 때문에 나는 지금도 시나리오를 쓸 때 구조적으로 먼저 접근한다. 이야기의 뼈대를 먼저 맞추고 각 뼈대에 들어갈 구체적인 신(scene)의 목록을 쓰는 것이다. 지문이나 대사를 채우지 않고 만족할 때까지 신의 목표와 순서만 정리한다. 그렇게 구조를 일단락시키고 각 신의 내용을 채우며 시나리오를 완성한다.

처음 배우기 시작한 1년 동안 쓴 시나리오는 사실 지금까지 쓴 작품의 절반 이상을 차지할 정도로 많았다. 겁이 없고 그저 쓰는 게 재미있었다. 하지만 시나리오가 쌓일수록 작품에 대한 불만이 생겼고 좋은 평가도 받지 못했다. 특히 구조적인 접근은 작품의 개연성을 높였지만, 그로 인해 인물 간의 갈등과 이야기가 뻗어나가는 힘을 약하게 했다. 나중엔 무리수를 두면서 소재가 과격해졌고 스스로도 이해하지 못하는 괴상한(?) 작품을 쓰기도 했다.

어떤 글을 쓸지 점점 혼란스러울 때, 나는 자신의 이야기부터 시작해보기로 했다. 애초에 내가 시나리오를 쓰고 싶었던 이유도 거기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기 위로, 자기 치유. 과거에 아팠던 경험들을 떠올렸고 소재를 찾았다. 이후에는 그동안 약점으로 여겼던 구조적 글쓰기가 되레 큰 도움이 되었다. 과거의 단순한 사건은 이야기 구조에 위치시켰고, 더 나아가 갈등을 극대화하고 이야기적 카타르시스도 가미했다.

아무에게도 보여주지 못한 혼자만의 일기장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유할 수 있는 시나리오를 쓰기까지 많은 시행착오를 겪었다. 나는 단순히 글쓰기의 기술이 아니라 왜 이야기를 써야 하는지에 대한 답을 찾게 되면서 비로소 나만의 시나리오를 완성할 수 있었다. 만약 자신의 삶이 무의미하게 느껴지고 의욕을 찾기 어렵다면, 우선 그에 대한 이야기부터 써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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