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북핵 불감증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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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09   |  발행일 2017-10-09 제31면   |  수정 2017-10-09
[월요칼럼] 북핵 불감증

지난 8월29일 오전 6시2분. 홋카이도 등 일본 동북부지역 12개 자치단체 야외 스피커에서 요란한 경보음이 울렸다. 동시에 주민들에게는 휴대폰으로 긴급 대피 메시지가 전달됐다. 북한이 사전예고 없이 일본 상공을 향해 탄도미사일을 발사하자 전국순간경보시스템 J얼럿이 작동한 것이다. 미사일이 일본 상공을 통과하기 4분 전의 일이었다. 미국령 괌 정부는 지난 8월 북한이 주변 해역 포위사격을 위협하자 주민들에게 비상행동 수칙을 담은 2쪽짜리 전단을 배포하며 발 빠르게 대응했다. 하와이주(州)도 오는 11월부터 북한의 핵 공격을 가정한 핵 민방위 훈련을 실시한다. 이와 달리 한국은 지난달 3일 북한의 6차 핵실험으로 강력한 지진이 발생하고 시민들의 문의가 이어졌지만 인공지진이라는 이유로 긴급재난문자조차 보내지 않았다.

북한의 핵·미사일 위협이 레드라인을 넘으면서 주변국의 우려가 커지고 대응 수위도 높아지고 있다. 그러나 정작 북한 도발의 최대 피해자가 될 가능성이 큰 우리나라는 안보불감증이 심각하다. 60년 넘게 이어진 휴전상태와 연평도 포격, 천안함 폭침 등 북한의 잇단 도발로 안보 위기의식이 그만큼 무뎌진 결과다. 여기다 설마 동족에게 핵미사일을 쏘겠느냐는 다소 안이한 인식도 작용했다. 오죽하면 미국 워싱턴포스트에서 21년간 기자생활을 한 프랭크 아렌스는 한국을 “세계에서 북한의 장거리 미사일과 핵무기를 전혀 무서워하지 않는 유일한 곳”이라고 꼬집었겠나.

밥 코커 미국 상원 외교위원장도 말했듯이 인정하고 싶지 않지만 6차 핵실험 이후 북한은 사실상 핵보유국이나 다름없다. 만에 하나 북한이 오판해 핵 공격을 한다면 6·25전쟁과는 비교가 되지 않을 정도로 그 피해가 상상을 초월한다. 미국의 북한 전문 매체 ‘38노스’가 지난 4일 공개한 ‘서울과 도쿄에 대한 가상 핵공격-인명피해’라는 제목의 보고서는 북한이 서울 중심부를 250kt 위력의 핵무기로 도발할 경우 단 한발로 약 78만명의 사망자와 277만명의 부상자를 낼 수 있다고 예측했다.

이처럼 전 국민이 꼼짝없이 북한의 핵 인질이 될 처지에 놓였지만 정부의 현실적인 안전대책은 불안하기만 하다. 전국 1만8천871개소의 민방공대피소 가운데 전시상황을 대비해 비상식량·의료장비 등을 구비한 곳은 거의 없다. 특히 최근 소방방재청의 용역조사에 응한 대피소 1만4천14곳 중 46%(6천456곳)는 핵·화생방 공격은커녕 재래식 폭탄에도 견디지 못하는 열악한 시설로 드러났다. 더구나 직장이나 집 근처의 민방공대피소 위치를 제대로 알고 있는 시민은 극소수에 불과하고, 아예 대피소가 없는 전국의 읍·면·동도 1천279곳이나 된다. 민방공훈련도 형식에 그쳐 강 건너 불구경하듯 긴장감을 찾아보기 어렵다.

핵·미사일 공격에 대한 대비는 오히려 우리보다 전쟁 위험이 낮은 유럽 선진국이 더 철저하다. 인구 840만명의 스위스는 핵 공격에 버틸 수 있는 대피소 건설을 의무화해 공공·개인 시설을 합쳐 30만개에 달한다. 독일은 16~65세 국민을 대상으로 미사일·핵공격 상황을 가정한 대응교육을 하고 있다. 10시간의 법정교육을 이수하지 않으면 과태료를 부과한다. 또 인구 5만명 이상 지역 신축건물에는 열흘 이상 견딜 식량과 물 등이 준비된 대피소 마련을 법으로 규정하고 있다.

물론 한반도에 더 이상 전쟁은 없어야 한다. 그러나 1%의 가능성이라도 있다면 철저히 대비하는 것이 국가의 책무다. 문재인 대통령은 “누구도 대한민국의 동의 없이 군사행동을 결정할 수 없다”고 강조하지만 지구상에 동의를 구하고 일어나는 전쟁이나 재난은 없다. 4세기 로마의 전략가 베게티우스도 ‘군사학 논고’에서 ‘평화를 원하면 전쟁을 준비하라’며 유비무환을 강조하지 않았나. 정부는 차제에 북한의 핵보유 등 변화된 안보현실을 반영해 민방공 훈련을 내실화하고 재래식 전쟁에 맞춰진 대피시설도 보완할 필요가 있다. 비상상황에 대처하는 매뉴얼도 정비해 초·중·고에서부터 체계적으로 교육해야 한다. 현재 7%에 불과한 민간 방독면 보급률도 끌어올려 1인 1방독면 체계를 갖추는 것이 바람직하다. 시민들도 최소한 비상시 행동요령과 주변의 대피소 위치만이라도 평소에 숙지하는 것이 소중한 생명을 지키는 길이다.

배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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