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밥상머리의 작은 기적] “점심시간 친구·선생님과 정보·고민 나누며 유대감 형성”

  • 최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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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10-09 07:40  |  수정 2017-10-09 07:40  |  발행일 2017-10-09 제18면
점심시간 대화 속 발견
“꽉 짜인 학교생활 속 유일한 즐거움
친구들과 식사예절 지키며 얘기해야
종종 은어·욕설 섞인 대화 오가기도
어른들도 책임갖고 함께 고민할 문제”
[밥상머리의 작은 기적] “점심시간 친구·선생님과 정보·고민 나누며 유대감 형성”
일러스트=최은지기자 jji1224@yeongnam.com

학교의 점심시간은 각 학교의 방침에 따라 여러 모습으로 펼쳐진다. 한 마디 말도 하지 않고 조용히 밥을 먹고 떠나야 하는 곳이라면, 이야기하고 싶어 하는 아이들을 제지하느라 밥 먹는 일 역시 하나의 곤욕이 되기도 하는 것이 사실이다. 물론 수백여 명의 학생이 동시에 식사를 하는 상황은 대단히 특수한 경우다. 조금만 이야기를 나누다보면 급식소 전체가 난리도 아닐 테니, 그러한 학교의 결정이 완전히 나쁜 것만도 아니다. 시설의 한계에 따른 어쩔 수 없는 결정일 것이다.

하지만 나는 적당한 공간에서 서로에게 피해가 가지 않을 정도의 예절을 지킬 수 있다면 학교에서 가지는 유일한 식사 시간인 점심시간에 아이들끼리, 혹은 아이들과 선생님이 함께 마주보고 이야기 나누는 행위 자체가 참 중요하다고 생각한다. 쉬는 시간이 있다지만, 아이들의 꽉 짜인 학교생활 속에서 점심시간만큼의 낙은 없다. 그래서 급식 시간에 조용하게 이야기 나누기를 미리 교육하기도 하고, 아이들끼리 조금은 조용하지 못한 경우에도 한 번씩은 눈감아 주기도 하는 것이다. 실제로 아이들은 긴 테이블에서 마주 보고 앉아 식사를 하면서 대화를 통해 그들만의 유대감을 형성하고 있다. 수업 시간 중에 벌어진 소소한 사건들을 그 자리에서 마무리하기도 하고, 집에서 있었던 일들을 서로 전하기도 하며, 아이들이 알고 싶었던 크고 작은 정보들이 이 시간에 공유된다.

교사와의 관계 역시 마찬가지다. 교탁에 서 있거나, 칠판 앞에 서서 수업할 때보다 점심시간에 나와 아이들의 관계는 한결 가까워진다. 내 근처에 앉아서 먹게 된 아이들은 자기가 하고 싶었던 사적인 이야기나 생각 따위를 전하고 싶어 하는 모습을 자주 발견한다. 밥을 한 술 떠 넣으면서 슬쩍 자신의 고민을 이야기하기도 한다. 간단한 상담에 있어서는 따로 불러서 진행하는 것보다 훨씬 자연스럽게 이야기가 이어진다. 급식 시간이 좀 지났다 싶으면, 남아 있는 아이들끼리 자리를 당겨서 옹기종기 모여 앉는다. 늦게까지 나와 함께 식탁에 있던 아이들은 나를 좀 더 가까운 대상으로 여기게 된다는 것도 여러 해의 경험으로 알았다. 내 옆자리에 오면 먹지 못했던 음식을 먹게 된다며 ‘마법의 식탁’이라는 아이들의 너스레에 아주 조금만, 한 번 먹어 보라며 다그치던 나도 그만 웃게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에 나는 이 아이들의 자유로운 이야기 내용에 종종 놀랄 때가 있다. 바로 줄임말이나 은어의 사용 때문이다. 사실 언어는 끊임없이 변화하고 새 역사를 만들어가는 유기체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줄임말이나 새로운 언어를 사용한다고 해서 무조건 우리의 언어문화가 망쳐진다거나, 그 아이들이 나쁜 행동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다만, 아이들이 ‘모르고’ 특정 세대, 특정 군상을 비방하는 말이나 거친 은어를 아무렇지도 않게 사용하고 있는 것만은 문제다. ‘인직’ ‘앙 기모띠’ ‘응 아니야’ ‘오진다’ ‘뚝배기 깨다’ 등 인터넷 방송이나 텔레비전 등 각종 매체에서 출발한 방송 언어들이 어린 학생들에게 무방비로 전달되고 이 아이들의 생활이 되고 있다는 것을 자유로운 대화가 오가는 점심시간에는 너무나 자주 확인하게 되는 것이다. 특히 규제조차 어렵다는 인터넷 방송에서 사용하는 질 낮은 언어들이 초등학생에게 얼마나 빠르게 전달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어른들 모두가 책임감을 가지고 문제의 심각성을 고심해 보아야 할 정도다.

얼마 전 한 도서관에서 복사본의 도서를 대출하여 우리 반 학생 모두가 함께 읽고 토의를 한 적이 있다. 안타까운 가정사 속에서 일어나는 질풍노도의 시기를 딛고 일어선 한 아이의 성장을 다룬 이야기다. 그러나 내게 조금 특별하게 다가왔던 사실은 토의와는 다른 것이었다. 아이들은 텍스트에서 간간이 보이고 있는 욕설에 대해 굉장히 불편하게 여기고 있었다. 주인공이 종종 내뱉는 욕설과 거친 행동 속에서 누구도 돌보아주지 않는 아이의 불행함을 투영하고 있었다. 그래도 아이들은 욕의 나쁜 점을 이미 배웠기에, 그러한 말들이 텍스트 속에서 작용하는 효과를 이해하고 있지만 소설 속의 문구를 읽어내는 데 다소 이물감 같은 느낌을 토로했다. 충분히 공감했고, 아이들과 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청소년문학이 가야 할 방향에 대해서까지 생각해 보는 중요한 계기가 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생각을 가지고 있는 아이들의 질 낮은 언어 사용은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그 언어들의 이물감에 대해서 아이들은 전혀 이해하고 있지 못했다. 아이들이 나누는 대화 속에서 등장하는 특정 어휘들이 어떤 점에서 욕설과 가까운, 혹은 욕설보다 더한 말인지에 대해서 그 누구도 가르쳐주지 않았던 것이다. 상업의 그림자에 아이들이 무방비로 노출된 것이 그대로 점심시간에 드러나고 있는 것이다. 자신의 생각과 감정을 이런 말로 밖에는 표현할 수 없게 된 아이들을 탓해야 할 일이 아니다. 어쩌면, 아니 당연히 우리의 문제다. 이 역시 점심시간에 알게 된 해결해야 할 문제다.

중국의 대표적 비판 지식인으로 일컬어지는 류짜이푸는 ‘면벽침사록’에서 신체에 가하는 폭력은 ‘간단한 폭력’으로, 언어로 인간의 영혼에 심한 손상을 주는 것을 ‘복잡한 폭력’으로 규명하고 있다. 점심시간, 복잡한 폭력이 오가는 우리 아이들의 대화 속에서 심각한 고민을 하게 된다. 김견숙<경북대사범대부설초등 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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