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증오와 저주의 굿판을 거둬라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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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9   |  발행일 2017-09-29 제23면   |  수정 2017-09-29
20170929

또다시 노무현이다. 노(盧)가 그리운 것도 아닐 텐데, 잊힐 만하면 그가 불려 나온다. ‘부부싸움 끝에 권양숙씨는 가출을 하고 그날 밤 혼자 남은 노 대통령이 스스로 목숨을 끊은 사건, 이것이 이명박 대통령 책임이란 말인가.’ 자유한국당 정진석 의원이 최근 SNS에 올린 글인데, 사실인지 소설인지 여부는 차치하고 곁에서 목격한 것처럼 생생하게 묘사하고 나섰다. ‘내가 아는 정치보복이란 이명박 전 대통령이 노무현 전 대통령에 가한 것’이라고 한 박원순 서울시장의 글에 대한 반박이라지만, 설령 사실에 근거했다고 하더라도 정 의원의 언행은 사자(死者)에 대한 모독으로 금도를 넘어 산 자가 지켜야 할 예의를 한참 지나쳤다. 노무현 대통령의 죽음이 이명박 대통령에 의한 정치보복의 결과가 아니라는 항변 치고는 동원된 수법은 졸렬하고 저의마저 의심스럽다. 이 같은 막말과 무자비함이 자유한국당의 전매특허인가.

노 전 대통령의 아들인 건호씨는 당장 서울중앙지검에 허위사실 유포로 인한 명예훼손 및 사자 명예훼손 혐의로 정 의원을 고소했다. 그는 기자들 앞에서 “아버님이 도대체 누구에게 무슨 잘못을 했기에 계속 현실 정치에 소환돼야 하는지 이해할 수 없다”며 “추악한 셈법으로 고인을 욕보이는 일이 다신 없길 바란다”고 말했다. 멀쩡한 자식이라면 누구나 비운에 돌아가신 아버지가 다시 부관참시 당하는 참상을 좌시할 수 없었을 터다. 정 의원과 가까운 사이로 알려진 국민의당 박지원 의원은 페이스북에 그를 나무라면서도 그가 늦게나마 사과를 한 만큼 민주당의 고발 자제를 당부했다. 정치적 수사는 법정에 불려가기보다는 정치적으로 푸는 게 맞다. 하지만 타인의 명예훼손, 특히 사자에 대한 모독마저 두루뭉술 넘어갈 수는 없다. 합당한 법적 판단이 기대된다.

가관인 건 찧고 까부는 정치권이다. 툭하면 진영 싸움으로 확대되고 소모적 정쟁이 날밤을 지새운다. 참새들이 모인 그런 집단이니 이런 호재를 두고 그냥 넘어갈 리 없지. 자유한국당 장제원 의원은 “유력 정치인, 전직 정치인 겸 연기자, 개그맨 등 너나 할 것 없이 정권이 바뀌어 축포라도 터트리듯 증오에 찬 고발을 하고 있다”며 설화를 당하고 있는 같은 당 정진석 의원을 두호하고 나섰다. 장 의원의 이 같은 훈수는 이명박 정권에 대한 검찰 수사에 이어 최근 여권에서 가동하고 있는 ‘적폐청산’ 프레임을 ‘정치보복’ 프레임으로 전환하려는 노림수다. 급기야는 노무현정부에서 홍보수석을 역임한 조기숙 이화여대 교수까지 “장 의원은 정말 정치탄압이란 걸 받아보지 못한 사람이라서 피해자에게 감정이입이 안 되는 건 당연한 일”이라고 공방에 가세했다. 동일한 사안에 대해 엇갈린 두 시각 사이에는 소실점도 없다.

유례없이 긴 추석 연휴, 풍성하고 한가로운 시간을 만끽하기에는 대내외적 우환이 결코 가볍지 않다. 미국과 북한이 선전포고까지 운운하는 일촉즉발의 국면은 남의 나라 일이 아니다. 참으로 볼썽사납고 더러운 진흙탕 싸움은 신물이 날 지경 아닌가. 참을 수 없는 정치인들의 가벼운 촉새들을 둘러싼 논란이 추석 차례상 앞에서 재연될까 벌써부터 두렵다. 적폐청산이든 ‘노무현 뇌물 재수사’든 하려면 말로만 하지 말고 확실하게 실행하라. 여태껏 매사가 미지근하게 처리되는 게 문제였다. 친일의 망령이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기에 두고두고 되살아나는 것처럼. 노무현 불러오기는 한국당이 궁하면 휘두르는, 이제 청산해야 할 전가의 보도다.

정치권은 증오와 저주의 굿판은 거둬들여라. 타인의 불행을 위기 극복의 수단으로 삼는 건 용서할 수 없는 죄악이다. 정치적 수사가 법정에 불려가는 4류 정치도 이번 기회에 끝장나야 한다. 이도 저도 아니라면 우리가 정신을 차릴 수밖에 없다. 정치권이 천지도 모르고 깨방정을 떨더라도 그것에 휩쓸리지 않을 지혜가 발휘돼야 할 시기다. 추석 연휴 오랜만에 모인 부자, 아재비와 조카 간에 정쟁에 오염돼 목소리를 높여서야 되겠는가. 한반도의 전쟁위기와 평화, 그리고 통일 등 당면한 국가적 의제가 진지한 성찰과 대화의 주제로 안성맞춤이다. 아니면 최소한 정치권의 증오와 저주의 마법에 걸리지는 말아야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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