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고려인은 오늘도 유랑중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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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8   |  발행일 2017-09-28 제31면   |  수정 2017-09-28
[영남타워] 고려인은 오늘도 유랑중

해마다 복사꽃이 필 때면 울진 왕피천에는 수만 마리의 황어떼가 몰려든다. 바다에서 자라 알을 낳기 위해 모천(母川)으로 회귀하는 태초의 여정이다. 황어는 높은 콘크리트 제방에 막히고 포획꾼에 의해 희생되기도 하지만 목숨을 걸고 강을 거슬러 올라간다. 오는 추석에 벌어질 귀성행렬처럼 사람 또한 수구초심(首丘初心)을 갖고 있다.

일제강점기 나라 잃은 망국민은 세계 여러 나라로 흩어졌다 광복이 되자 모국으로 돌아왔다. 하지만 국경이라는 장벽에 부딪혀 귀국이 불가능한 동포도 있었다. ‘고려인’이라고 불리는 ‘카레이츠’ 또는 ‘카레이스키’도 그 가운데 하나다.

최근 고려인 중앙아시아 강제이주 80주년을 맞아 우즈베키스탄 아리랑요양원을 다녀왔다.

일행들이 요양원 내 고려인들 앞에서 아리랑을 부르자 몇몇 동포는 눈물을 훔쳤다.

우즈베키스탄에는 현재 17만여명의 고려인이 살고 있다. 이들은 1937년 9월9일부터 11월15일까지 러시아 극동 연해주에서 중앙아시아 황무지로 강제이주된 한민족과 그 후손이다. 고려인 1세는 스탈린의 민족차별·분리정책에 따라 화물열차에 짐짝처럼 실려 30일 넘게 6천500㎞를 서진해 카자흐스탄 우슈토베에 부려졌다. 이 와중에 추위와 굶주림 등으로 1만여 명이 숨졌다. 살아남은 동포는 토굴을 파거나 움막을 지어 그해 겨울을 났다. 80세 중반을 넘은 이들은 당시를 희미하게나마 기억한다.

고려인은 카자흐스탄을 떠나 우즈베키스탄, 러시아, 키르기스스탄, 타지키스탄 등지로 흩어졌다. 이들은 이제 50만명으로 불어났다. 김 율리아, 이 세르게이, 박 빅토르 등 고려인은 나라는 달라도 한민족이란 뿌리를 잊지 않고 있다. 우즈베키스탄의 경우 고려인 간 결혼은 90% 가까이 되며 80% 이상이 대학에 진학하고 있다. 130여 개나 되는 민족 중 고려인은 가장 높은 교육열을 자랑하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91년 옛 소련이 해체된 후 중앙아시아 독립국가 고려인은 또 다른 차별로 어려움을 겪고 있다. 독립국가들이 자민족중심주의 정책을 펼치면서 러시아어만 해도 살아가기 무방했던 이들은 본국의 언어를 써야 하는 이중고를 겪고 있다. 소련 붕괴 후 독일, 이스라엘, 일본은 중앙아시아 거주 자민족을 조건없이 다 받아들였지만 우리는 그렇게 하지 않았다. 고려인은 본국뿐만 아니라 모국에서도 찬밥 신세다.

현행 재외동포법에 따르면 고려인 3세까지는 재외동포로 분류된다. 그러나 재외동포비자(F4)를 받은 부모를 따라 동반 비자로 입국한 자녀(고려인 4세)는 만 24세가 넘으면 강제로 출국해야 한다. 부모가 취업비자(H2)인 고려인 4세는 더 딱하다. 부모는 3년마다 다시 절차를 밟아 갱신해야 재입국할 수 있으며, 자녀들은 국내 출생이라도 만 19세가 되면 3개월에 한 번 본국으로 가 관광비자로 다시 들어와야 한다. 이를 거부하면 불법체류가 돼 건강보험에 가입할 수 없으며 다문화가정에 지원되는 혜택도 받을 수 없다. 억울한 건 재미·재일·재러동포에겐 그런 제한이 없다는 점이다. 같은 처지인 중국동포 4세(조선족)의 경우 중국내 조선족학교가 있고 우리말 교육을 어릴 때부터 받아 언어소통이 고려인보다 낫다.

지난 17일 경기도 안산에서 열린 고려인만민회의 도중 고려인 4세 한미샤군(12)은 편지로 “엄마·아빠와 헤어지는 것이 정말 두렵습니다. 도와주세요”라고 정세균 국회의장에게 호소했다. 이를 계기로 최근 정부가 고려인과 중국동포 4세들에게 2019년 6월까지 한시적으로 방문동거 자격을 부여하는 조치를 시행한다고 발표했으나 미봉책일 뿐이다. 재외동포정책은 시대에 맞게끔 혁신적으로 개선돼야 한다. 고려인·조선족동포 4·5세에게 국적을 허하라. 이는 저출산과 인구절벽을 극복하기 위한 방법이기도 하다.

메르켈 독일 총리는 2015년부터 이민족임에도 약 100만명의 난민을 받아들였다. 그는 최근 “다시 그런 상황이 와도 그대로 할 것”이라고 했다. 하물며 같은 민족임에랴.

박진관 기획취재부장·사람&뉴스전문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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