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22] 식량난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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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8   |  발행일 2017-09-28 제29면   |  수정 2017-09-28
“식량난 불구경 美軍政 퇴진하라” 대구기자단 공동성명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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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신문편집자회와 신문기자단은 식량배급이 되지 않고 아사자까지 나오자 미군정 경북도를 향해 ‘도탄에 빠진 인민을 구제할 수 없다면 퇴진하라’는 성명을 냈다.(1946년 8월23일자)

‘~이재민과 극빈자는 매일 230명이 군청에 살도하니 그 처리에 두통만 앓지 아무 처리도 없다는 생지옥과 같은 기근상태에 봉착하고 있는데 이 위기의 타개책을 강구하고자 7일 오후 래구한 영덕군수 정기식씨는 기자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식량사정은 군시에도 심각함을 알 수 있다. 더욱 위기에 처한 곳은 농촌일 것이다. 초근목피로 생명을 유지하며 안색이 부황색을 가진 자를 헤아릴 수 없다. ~’(영남일보 1946년 4월8일자)

수일간 쌀 한톨 구하기 어려워
아사직전 내몰린 생지옥 상황
초등학교 3분의 2가 결식아동
주민 수시로 도청으로 몰려가
핏빛 선명한 10월의 비극 예고



당시 영덕의 쌀값은 1두에 960원이었다. 그나마 돈이 있으면 쌀을 구할 수 있다는 희망이라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러지 못했다. 식량난은 아이들에게도 큰 고통을 주었다. 3월 개학이 됐지만 국민학교 출석률은 절반으로 뚝 떨어졌고, 3분의 2는 결식아동이었다. 게다가 6명이 굶어 죽는 등 하루가 다르게 피해가 늘어났다. 영덕의 사례는 대구나 경북의 다른 지역 상황과 다르지 않다. 기사 속의 ‘~230명이 군청에 살도하니’의 살도(殺到)는 쇄도의 잘못된 표현이다.

굶주린 배를 껴안고 하루하루를 넘긴다는 것은 상상 이상의 고통이었다. 며칠 동안 잡곡 한 톨 제대로 구경하지 못했다는 주민이 수두룩했다. 급기야 배급을 기다리던 시민들이 배고픔을 참다못해 수시로 도청에 몰려들었다. 말할 기력조차 없는 비참한 상태였지만 그래도 살기 위해 식량을 구하러 다녔다. 어린애를 업고 쌀을 달라고 호소하는 눈물겨운 장면도 낯설지 않았다. 기아의 비참함을 참다못해 스스로 목숨을 끊는 사람도 하나둘 늘었다.

광복되던 해 일본에서 돌아온 전재민이었던 젊은 여성이 사흘이나 굶다가 음독자살을 한 경우도 꼭 같다. 이 여성은 입에 풀칠할 식량조차 제때 구하지 못하고 하루하루를 연명해 왔다.

더구나 7~8명이나 되는 식구들이 아사 직전에 내몰린 것을 차마 눈 뜨고 볼 수가 없었다. 자신도 3일 동안 물만 마시고 버티다가 결국은 삶은 포기한 것이다. 광복 1년이 다 된 1946년 8월14일 일어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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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식량사무를 담당한 계원은 과장에게, 과장은 부윤에게, 부윤은 도청에, 도 농상부장 서만달씨는 미인부장 헐츠씨에게, 헐츠씨는 다시 조선인 관사에게 각각 책임을 전가하는 것은 관사의 무능한 것을 폭로하는 것이다. ~민중을 무시한 관사의 태도를 버리라. 일반시민에게는 배급하지 않고 관공사에게만 특 배급한 것은 일제시대의 민중을 착취하던 관공사의 정신이 그대로 남아있는 것이라고밖에 볼 수 없다. ~’(영남일보 1946년 8월23일자)

급기야 대구신문편집자회와 신문기자단은 미군정 경북도의 반성을 요구하며 도탄에 빠진 인민을 구제할 수 없다면 퇴진하라는 공동성명을 발표했다. 또 경북도의 관리들이 신문에 대놓고 계속 거짓말을 함으로써 민중은 신문조차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고 개탄했다. 이렇듯 미군정은 조선 민중이 죽고 사는 식량 문제를 남의 집 불구경하듯 했다. 거기에는 일제강점기 옷을 그대로 걸친 조선인 관리들까지 끼여 있었다. 핏빛 선명한 10월의 비극을 부르고 있었다.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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