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4> ‘근원의 뜻이 지속되는…’ 청송 안덕면의 송오정, 송학서원, 화지재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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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7   |  발행일 2017-09-27 제13면   |  수정 2021-06-21 17:19
커다란 바위와 한 그루 소나무…松塢의 귀거래사가 들리는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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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안덕면 복리 소대마을에 자리한 송오정 전경. 송오정은 영조 때의 선비 신해관이 지은 정자로, 송오정기에 따르면 ‘모든 사람이 그를 믿고 따르며 즐거워했다’는 내용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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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학서원은 명지재 민추가 1568년 명당리에 세운 명지재 서당을 모태로 1702년 유림들에 의해 건립됐다.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퇴계 이황, 학봉 김성일, 여헌 장현광을 배향하고 있다.

 

 

누정의 역사에 있어서 수백 년에 걸쳐 지속된 정신은 ‘불멸’이다. 불멸은 영원에 걸쳐 무너지지 않을 균형을 갖춘 성실한 현재다. 성실한 현재는 오랜 뿌리를 거듭 상기하고 일으키는 것으로 구현된다. 청송군 안덕면의 송오정과 송학서원, 화지재는 각각 발단이 다르다. 그러나 지속되어온 정신과 성실한 현재는 같다. 그곳은 근원적인 것이 지속되는 장소이며, 사람들은 그곳을 지킨다.

#1.복리 소대마을의 송오정

안덕면 소재지인 명당리의 남쪽에 복리(福里)가 있다. 보현산을 향해 길게 나아가는 골짜기의 초입이다. 복리는 평산신씨(平山申氏) 세거지로 인조 때인 1654년 종사랑(從仕郞)을 지낸 신광계(申光繼)가 아버지 신벌(申)과 함께 개척했다고 한다. 길지를 찾아다니다 발견했다는 이곳은 들이 넓고 천이 동네와 조금 떨어져 있어 수해와 재해가 없는 땅이었다. 복리 소대마을 앞 환한 잔디밭에 마을의 이력을 알려주는 여러 비가 서 있다. 병신창의 때 활약하였던 신필호(申弼鎬)의 독립운동기념비, 가뭄을 이겨낼 수 있도록 운지곡 저수지와 송림 저수지를 만든 노사(鷺沙) 신흥한(申興漢)의 송덕비, 그리고 마을 이름 ‘소대’의 유래비 등. 원래 마을은 노송이 우거진 가운데 자리해 송대동(松臺洞)이라 했다. 이후 마을 전역에 차조기 잎 ‘소엽(蘇葉)’이 저절로 자라 소대(蘇臺)가 되었다.


영조 때 선비 신해관이 건립한 송오정
숨어 살면서도 도의 지키는 뜻 전해져
퇴계 이황·학봉 김성일 모신 송학서원
300여년 지난 지금도 유림정신 이어와
장전리에 자리한 남계조 재실 화지재
남동쪽 남계조 묘소와 향나무 바라봐



너른 들을 바라보는 마을 안쪽으로 낮은 돌담길이 직선으로 뻗어 있다. 담 저편의 키 큰 나무들이 상체를 기울여 길에 투명한 그늘을 드리운다. 길 입구에는 돌담과 키를 맞춘 송오정(松塢亭) 표지석이 서 있다. 길 끝에는 옥색 철 대문이 보인다. 저 대문 속에 송오정이 있을 거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단단하고 촘촘한 문살의 상세가 보일 만큼 다가가서야 대문 위로 솟아오른 팔작지붕을 알아차린다. 빗살무늬로 쌓아올린 높고 견고한 돌담이 정자를 에워싸고 있다. 담과 대문은 무뚝뚝하면서도 정중하게 방문객의 접근을 차단한다.

송오정은 영조 때의 선비 신해관(申海觀)이 지은 정자다. 그는 잠시 성균관에 있다가 돌아와 숨어 살았는데 옛집을 수리해 정자를 짓고 한 그루 소나무를 어루만지며 노닐었다 한다. 옛날에는 가운데 3칸 방을 두고 동서에 마루를 낸 구조였다. 마루에 기대 아래를 보면 물고기들이 헤엄쳤고 갈매기가 모래사장을 오르내렸으며 멀리 기름진 들이 내다보였다 한다. 현재 송오정은 새로 개축한 것으로 정면 4칸, 측면 1.5칸 규모다. 가운데 2칸이 대청이고 양쪽은 방이며 전면 반 칸은 툇마루다. 정자 왼쪽에는 살림집으로 보이는 붉은 벽돌 건물이 있는데 모송재(慕松齋) 현판이 걸려 있다. 마당에는 커다란 바위와 한 그루 소나무가 있다. 대문 앞에 서면 돌담길 너머로 들의 조각이 보인다. 정자에 오르면 멀리 넓은 들이 보이지 않을까.

송오정기(記)에 ‘모든 사람이 그를 믿고 따르며 즐거워했다’는 내용이 있다. 그는 꺾이지 않는 강함이 있고, 숨어 살면서도 도의를 굳게 지켰으며, 죽음을 기약하며 귀거래사(歸去來辭)를 읊은 인물이었다 한다. 후인들은 ‘다시는 그의 모습을 볼 수 없고 그의 기침소리도 들을 수 없지만 향기와 빛이 아직 남아있어 지팡이 짚고 노니시던 곳에 더욱 슬픈 감회가 있다’고 소회했다. 송오(松塢)는 신해관의 호다. 송대는 소대가 되었지만, 송오라는 이름과 그가 어루만지던 한 그루 소나무는 지켜야 하는 어떤 것의 상징이었을지 모르겠다. 이제 높은 담장의 어스름 속으로 물러난 송오정은 스스로 근원적인 것이 성장할 양분이 되어 깊고 고요한 고독으로 돌아간 듯하다.

#2.장전리 창말의 송학서원

명당리의 동쪽 길안천변에는 너른 가람들이 감쪽같이 숨겨져 있다. 한길 가에 다소 휑뎅그렁하게 서있는 송학서원(松鶴書院) 이정표를 따라 샛길로 들어서면 그제야 들은 흔연히 제 모습을 펼쳐 보인다. 둘러선 산줄기는 멀고 들은 세상에서 가장 너른 호수처럼 잔잔하다. 마을은 장전리 창말. 옛날 안덕면의 식량창고가 이곳에 있었다 한다.

송학서원은 들의 선두에 낮게 자리한다. 동쪽을 향해 선 외삼문의 양쪽으로 긴긴 담장이 뻗어나가 서원을 크게 감싸 안고 있다. 삼문 앞에는 소나무 몇 그루가 꼬장꼬장하면서도 장려하게 솟아 있다. 창말과 가람들과 서원 모두를 파수하는 자세다. 송학서원은 영남사림을 대표하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학봉(鶴峰) 김성일(金誠一), 여헌(旅軒) 장현광(張顯光) 세 분을 배향한다. ‘푸른 소나무와 하얀 학은 분수에 없는 것이지만(靑松白鶴雖無分), 푸른 물과 붉은 산은 인연이 있네(碧水丹山信有緣)’라는 퇴계의 시가 있다. 퇴계 이황이 자신의 본향인 청송을 동경하여 읊은 노래다. 송학서원은 이 시구에서 ‘송(松)’과 ‘학(鶴)’ 두 글자를 따서 지은 이름이다.

남쪽 담장 밖에 주사 건물과 화장실이 위치한다. 근래의 것인지 산뜻하다. 주사 뒤 담벼락에 나있는 좁은 통로로 들어가면 반듯하고 넉넉한 공간이 펼쳐진다. 경역 안에는 강당과 사당, 동서재가 질서 있게 자리하고 있다. 송학서원 현판이 걸려 있는 강당은 정면 4칸, 측면 2칸에 팔작지붕집이다. 마루방을 중심으로 양쪽에 협실이 있고 전면의 반 칸은 툇마루다. 동재에는 직방재(直方齋), 서재에는 존성재(存省齋) 현판이 걸려 있다. 동서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맞배지붕 건물로 정연한 4개의 방에 툇마루가 있는 엄격한 얼굴이다. 별도의 담과 삼문으로 구획되어 있는 사당 존덕사(尊德祠)는 정면 3칸, 측면 1칸에 맞배지붕 건물이다. 송학서원의 모든 맞배지붕은 박공면 판자 끝부분이 간결한 조각으로 장식되어 있다. 소소하나 눈에 띄는 공력이다.

송학서원은 명지재(明智齋) 민추(閔樞)가 1568년 명당리에 세운 명지재 서당을 모태로 1702년 유림들에 의해 창건되었다. 이후 1882년 흥선대원군의 서원 철폐령이 내려지기 전까지 180여 년간 송학서원은 삼자현 이남의 유일한 서원으로 인재 육성과 유림 활동의 구심체 역할을 했다. 서원철폐령이 내려지자 유림들은 서원을 서당으로 격하시켜 보호했다. 송학서당이 다시 서원으로 격상된 것은 1996년이다. 사당은 2010년에 건립했다. 시작부터 현재까지 송학서원을 지키려는 유림의 안간힘이 서원의 정신이다. 그로 인해 완전하게 구현된 서원의 오늘이 과거를 압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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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지재는 영양남씨 청송 입향조인 운강 남계조의 재실이다. 남계조는 생활이 검소했고 자제 교육에 엄격한 사람이었으며, 특히 효행으로 칭송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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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지재 남동쪽 언덕에 자리잡은 수령 400년의 거대한 향나무. 조상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심은 나무라고 한다
 

#3.장전리 화지곡의 화지재 

 

창말 마을의 가람들 동쪽 산지에는 단 몇 채의 집이 부락을 이루는 조그마한 골미골이 있다. 꽃봉오리 같은 산세에 작은 연못이 있어 화지곡이라고도 하는데 높지 않은 산이 사방을 둘러싼 소래기 같은 땅이다. 그 속에 영양남씨(英陽南氏) 청송 입향조인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재실인 화지재(花池齋)가 있다. 영양에 살던 그는 임진왜란 때 노모를 모시고 장전리로 피란해왔다고 한다.

남계조는 생활이 검소하고 자제 교육에 엄격한 사람이었다. 문을 내고 길을 열고 꽃과 돌을 배치하는 데 남달랐으며, 시(詩)와 예(禮)가 깊고 효와 우애는 높았다 한다. 특히 효행으로 칭송받았는데 당시 관찰사 김공수가 충효로 천거해 통정대부 부호군에 제수되기도 했다. 1621년 세상을 떠난 그는 화지곡의 매척산(梅尺山) 자락에 묻혔다. 재사는 인조 때인 1629년에 처음 8칸으로 세우고 영모재(永慕齋)라 했다. 이후 재실은 여러 번 무너졌다. 그때마다 후손들은 힘껏 고쳐 세우기를 거듭했는데 1937년에는 재실을 영구히 지키기 위한 별소를 짓고 골짜기의 이름을 따 화지재라 재명을 고쳤다.

화지재는 정면 4칸, 측면 2칸에 홑처마 건물로 중앙 2칸은 대청이고 양쪽은 2칸은 통으로 된 온돌방이다. 막돌로 초석을 놓고 대부분 네모기둥을 올렸는데, 대청 전면의 중심에만 둥근 기둥을 세웠다. 지붕은 4칸보다 좁은 너비의 맞배지붕을 얹고 양쪽 측면에 산기둥을 세워 가적지붕을 달아놓았다. 가적지붕은 마치 차양처럼 지붕 아래나 건물에 이어 달아놓은 짧은 지붕을 말하는데 재사건물에서는 볼 수 없는 형식이다. 재사 서쪽에는 ‘ㄱ’자형 주사(廚舍)가 있고 앞마당 동쪽에는 3칸 동재가 자리 잡고 있다.

재사는 남동향을 바라본다. 거기 햇빛을 받는 언덕에는 남계조의 묘소와 묘도비각(墓道碑閣)과 거대한 향나무가 있다. 천연기념물로 지정되어 있는 400년 된 향나무는 조상의 은덕을 기리기 위해 묘하에 심은 것이라 한다. 화지재에는 사람이 산다. 재실을 영구히 지키고자 했던 오래전의 도모는 지금도 지켜지고 있다. 최초의 형식은 변했지만 착실하고 소박하게 지켜온 마음이 화지재에 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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