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5] 두 임금의 신임을 얻은 전가식(田可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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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25   |  발행일 2017-09-25 제13면   |  수정 2017-10-26
[조선 문과] 정종 1년(1399) 기묘(己卯) 식년시(式年試) 을과(乙科) 1위[壯元]
‘左正言 시절 직언’ 끈질긴 공세 받아…감싸던 왕 두 손 들고 廢庶人 명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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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가식의 직언 상소는 태종 대에 이어 세종 대까지 빌미가 됐다. 세종의 신임 역시 두터웠지만 결국 전가식은 폐서인되는 고초를 겪어야 했다. 세종실록 4권, 세종 1년 5월22일 병인 첫 기사에는 전가식을 서인으로 폐한다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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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2년 4월 전가식은 태종에게 ‘방탕을 경계하고 간쟁을 받아들일 것’을 청하는 상소를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놓았다. 태종의 신임이 두터워 처음에는 크게 문제되지 않았지만 사헌부·사간원·의정부의 잇단 파직 요청에 결국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태종실록 3권, 태종 2년 4월1일 계축 첫 기사에 전가식의 상소 일화가 상세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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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23권, 태종 12년 5월17일 경자 첫 기사에는 ‘고려를 사모하는 시를 지은 서견을 임금이 용서한다’는 내용이 기록돼 있다.

태종의 장인 민제(閔霽)의 제자였던 전가식(田可植)은 장원방 출신 첫 장원급제자다. 장원방은 조선 초 인재향으로 15명의 과거급제자를 배출한 마을이다. 옛 영봉리를 일컫으며 지금의 구미시 선산읍 이문·노상·완전리 일대가 그곳이다. 장원방 출신 전가식은 관직에 나가서는 직언을 서슴지 않았던 강직한 관료였다. 1402년 4월 태종에게 ‘방탕을 경계하고 간쟁을 받아들이라’는 상소를 올려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기도 했다. 결국 세종 대까지 이 일이 빌미가 되어 결국 폐서인(廢庶人)되고 말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태종과 세종 두 임금의 신임이 두터웠다. 1449년 84세로 세상을 뜨자 세종이 슬퍼하며 예관(禮官)을 보내 조문하게 했다고 한다.

#1. 장원방이 배출한 첫 장원급제자

1399년(정종1) 4월5일, 경복궁 집현전에서 기묘식년시(己卯式年試)가 실시됐다. 시험관으로는 여흥백(驪興伯) 민제(閔霽, 1339~1408)와 청성군(淸城君) 정탁(鄭擢)이 나왔다. 그리고 그날 그들이 을과(乙科) 1위, 즉 장원(壯元)으로 올린 이가 바로 선산 영봉리(장원방) 사람 전가식이었다. 영봉리에서 첫 장원급제자가 탄생한 역사적인 날이었다.

민제는 기쁨에 겨웠다. 전가식을 비롯해 조서(趙敍, 동진사 3위), 이공의(李公義, 동진사 7위), 옥고(玉沽, 동진사 11위) 등 자신이 아끼는 제자들이 모두 급제한 때문이었다. 같은 해 같은 시험에 합격한 동기가 되었으니, 앞으로 큰일을 도모하는 데 서로 힘이 될 것이었다. 민제는 그들을 모두 집으로 불러 잔치를 벌였다. 그리고 그 소식을 전해들은 정종이 내시부의 관원을 통해 술을 하사했다. 환갑이 된 원로에 대한 치하이자 이제 막 관료에 입문한 정치새내기들에 대한 격려였다.


장원방이 배출한 첫 장원급제자
태종과 길재의 유일한 소통창구
태종의 장인 민제의 제자이기도

좌정언 시절 “방탕 경계…” 상소
대간들 “不忠…단죄해야” 공세
감싸던 태종, 파면으로 마무리

태종이 죽자 대간들 또 문제삼아
세종도 어쩔 수 없이 내치기로 해
훗날 전가식 세상뜨자 세종 눈물



그만큼 민제는 대단한 인물이었다. 그는 1357년(고려 공민왕 7)에 문과에 급제해 예의판서(禮儀判書), 예문관제학(藝文館提學), 한성부윤(漢城府尹) 등 고위요직을 두루 거친 거물 중의 거물이었다. 그리고 전가식이 장원급제한 이듬해인 1400년에는 문하우정승(門下右政丞, 정1품)이 되었다가 곧이어 좌정승에도 올랐다. 게다가 그의 사위가 이방원이었다. 얼마 뒤 이방원이 태종이 되면서 민제는 임금의 장인이 되었다.

이는 민제의 인생에 아주 중요한 영향을 미쳤다. 하나는 자신의 안위를 지킬 수 있었다는 점이다. 훗날 몇몇 사건에 연루돼 탄핵을 받았을 때 무사할 수 있었던 것은 태종의 비호 덕분이었다. 물론 어질고 검소하고 학문이 높아 평소 태종의 신임이 두텁기도 했다. 다른 하나는 아들 넷이 모두 비극적으로 죽었다는 점이다. 그에게는 무구(無咎)·무질(無疾)·무휼(無恤)·무회(無悔) 네 아들이 있었다. 특히 무구와 무질은 이방원이 왕자 시절에 일으킨 1차 왕자의 난에서 공을 세운 공신이었다. 하지만 민씨 가문이 세자에 대한 영향력을 키워 득세할 것을 염려한 태종에 의해 훗날 모두 죽임을 당했다. 물론 민제는 아들들의 죽음을 직접 겪지는 않았다. 무구와 무질은 1410년, 무휼과 무회는 1416년 화를 당했는데 그때는 민제가 죽은 뒤였다.

#2. 집요하게 이어진 상소 사건

1402년(태종2) 4월의 첫 날, 좌정언(左正言, 정6품) 전가식이 동료 내서사인(內書舍人, 종4품) 이지직과 함께 올린 상소 하나가 조정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

“전하의 통치력이 뛰어나신 것은 맞습니다. 하나 화려한 것을 좋아하고 음악과 여색을 즐기시는 데다 대간의 말이 거슬린다 하여 툭하면 노하시는 것 또한 사실입니다. 하여 저를 비롯한 신하들뿐만 아니라 백성들마저도 실망을 느끼고는 합니다. 부디 근검하시고 방탕을 경계하시며 간쟁을 받아들이시고 감정을 통제하시기를 엎드려 바라옵니다.”

그러면서 중국의 영향으로 나라에 화가 잦으니 근심하고 조심해야 한다고 몇 가지를 조언했다. 특히 군 정책에 있어 보완해야 할 점 등을 구체적으로 조목조목 읊었다. 태종은 순순히 수긍했지만 섭섭한 속내도 내비쳤다.

“따로 은밀히 일러줬어도 다 들었을 텐데 공개적으로 상소해 기록에 남게 되었으니 마음이 아프다.”

이 소식이 알려지자 사헌부가 득달같이 들고 일어났다.

“전하의 자질이 뛰어나 중국 조정에서조차도 칭찬을 아끼지 않는 터에 전가식이 거짓으로 전하의 명예를 훼손했습니다. 국문한 다음 외방으로 귀양을 보내소서.”

하지만 태종은 의외로 덤덤하게 반응했다.

“됐다. 간관이 한 말을 두고 어찌 벌을 내린단 말인가.”

그러자 사헌부지평이 사직을 청하는 한편 다른 신하들도 강하게 반발했다.

“전가식은 조언죄(造言罪, 근거 없는 사실을 꾸민 죄)를 지은 죄인입니다. 불충도 그런 불충이 없습니다. 마땅히 벌을 내려야 함에도 불구하고 전하께서 윤허하지 않으시다니 납득할 수 없습니다.”

태종은 여전히 전가식 편을 들었다. 상소는 달을 넘긴 5월에도 이어졌다. 이번에는 사간원과 의정부였다. 불경스럽기가 이루 말할 수 없다며 명백하게 단죄해야 한다는 내용이었다. 잇단 상소에 결국 천하의 태종도 두 손 두 발을 다 들었다. 결국 5월11일 전가식을 순군(巡軍, 의금부)에 보낸 데 이어 파면한다고 명을 내려야만 했다.

하지만 국문 중에 난데없는 사실 하나가 드러났다.

“그런 엄청난 발언을 네가 혼자 알아서 했을 리가 없다. 누가 사주했느냐?”

“사주라기보다는 전에 여흥부원군에게 제 뜻을 고했더니 ‘네 말이 옳다’고 하신 적은 있습니다.”

여흥부원군(驪興府院君)은 바로 민제였다. 전가식의 스승이자 태종의 장인이다. 이 일로 다시 한 번 논란이 됐지만 태종은 그냥 넘어갔다. 임금의 비호에도 불구하고 상처를 받은 민제는 다시는 제자들을 만나지 않았다. 그런데 이 일이 훗날 화근이 되었다. 1408년(태종8) 태종이 민제의 아들 무구와 무질 형제를 유배지로 내칠 때 빌미 중의 하나가 된 것이다.

“지난번 전가식의 상소 건을 보라. 배후에서 충동질한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느냐. 다만 내 입장이 난처해 모른 척했을 뿐이다.”

이 일은 태종이 죽고 세종이 왕위에 오른 뒤에도 끈질기게 언급됐다. 1419년(세종1) 5월 사헌부에서 다시금 전가식에게 더한 벌을 내려야 한다고 주장하고 나섰다. 세종은 거절했다.

“아버지께서 허락하지 않으신 일을 내 마음대로 할 수는 없다.”

하지만 대간들의 상소가 집요하게 이어지자 세종도 결단을 내릴 수밖에 없었다. 세종은 태종이 죽는 순간까지 머물렀던 수강궁에 들러 인사한 후 전가식을 서인(庶人)으로 폐한다는 명을 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대간들은 만족하지 못했다. 더 큰 벌을 내려야 한다고 다시 상소를 거듭했다. 하지만 세종도 더 이상은 허용 불가였다. 아버지 태종이 아끼던 신하였고, 태종이 괜찮다고 넘어간 일이었다. 이에 세종은 입을 닫고 아무런 언급도 하지 않는 것으로 대처했다.

#3. 임금의 신임이 두텁고 깊어

실제로 전가식에 대한 태종의 신임은 굉장히 두터웠다. 1412년(태종12)의 일에서 짐작할 수 있다. 그해 고려조의 사람으로 사헌장령(司憲掌令)을 지낸 서견(徐甄)이 시 한 수를 지었다.


천년(千年)의 신도(新都)가 한강(漢江)을 사이하는데/ 충량(忠良)들이 성하게 밝은 임금 도웁네./ 삼한(三韓)을 하나로 통일한 공이 어데 있는고?/ 도리어 전조(前朝)의 왕업이 길지 못한 것이 한(恨)스럽도다.

고려를 잊지 못하고 있다는 데서 나아가 고려의 멸망을 한스러워한다는 내용이었다. 말 그대로 서견은 고려에 대한 사모의 정이 깊은 사람이었다. 조선이 세워지는 과정에서 은둔을 택했을 뿐만 아니라 이색(李穡)·원천석(元天錫)·길재(吉再) 등 고려에 절개를 지킨 충신들과 어울려 그 심정을 나누기도 했다. 그런데 서견은 한술 더 떠 ‘한스럽다(恨)’는 글자를 ‘탄식한다(嘆)’로 고쳐서 전가식에게 보여주었다. 그런 시를 나눌 만큼 가까웠던 것이다.

시를 받아본 전가식은 심난해졌다. 이에 지인이었던 참찬(參贊) 김승주에게 그 속내를 의논했는데, 김승주가 이를 조정에 일러바치고야 말았다. 당연히 문제가 됐다. 서견을 잡아서 시를 지은 저의를 따져야 한다는 의견이 분분했다. 하지만 태종이 단호하게 말렸다.

“고려 신하가 고려를 잊지 못하는 것은 인지상정이다. 우리 이씨(李氏)도 영원하지는 않을 텐데, 우리 이씨에게도 서견과 같은 신하가 있다고 생각하면 아름답지 않느냐. 그냥 내버려두라.”

물론 표면적으로만 보면 태종이 서견에게 아량을 베푼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 뒤에는 자신이 믿어 의심치 않는 전가식이라는 신하가 있었다. 서견을 잡으면 그 시를 공유한 전가식도 무사하지 못할 일이었다. 태종이 누구던가. 고려에 대한 충심을 바꾸지 않는다는 이유로 정몽주를 때려 죽인 사람이 아니던가. 그런데 봐준 것이다.

실제로 태종 이방원은 전가식의 말이라면 신임하는 경향이 있었다. 위화도회군이 일어나던 해에 벼슬을 버리고 선주(善州, 지금의 선산)로 낙향해버린 길재의 경우에도 그랬다. 이방원은 자신의 곁을 떠난 길재를 10여년이 흐를 때까지도 내내 놓지 못했다. 당시 왕위를 코 앞에 둔 왕세자였던 이방원은 결국 길재를 찾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시간이 너무 흐른 탓에 길재에 대한 소식을 좀체 들을 수 없었다. 이에 길재와 동향이자 자신이 신임하는 신하인 전가식을 불러들였다. 그때 전가식은 정자(正字, 홍문관·승문원교·교서관의 정9품 벼슬)로 일하고 있었다.

“길재가 어찌 지내고 있는지 알려다오.”

“한결같이 후진 양성에 애쓰고 계십니다. 무엇보다도 효성이 지극해 모두 우러러보고 있습니다.”

이후로도 이방원은 전가식을 통해 길재와 소통했다. 물론 길재가 이방원이 내린 벼슬을 끝내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 과정에서 이방원이 전가식을 전적으로 의지했음은 물론이었다. 그러니 그 진심을 세종이 대를 이어 따른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세종은 1449년(세종31)에 전가식이 84세로 세상을 떴을 때 예관(禮官)을 보내 조문했다. 기록에 의하면 세종이 크게 슬퍼했다고 한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동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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