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부의 神, 천재들의 요람 선산 壯元坊Ⅱ .4] 장원방의 엘리트 ‘정지담(鄭之澹)’- <하>탁월한 업무능력을 보인 명석한 관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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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18   |  발행일 2017-09-18 제13면   |  수정 2017-10-26
[조선 문과] 태종 16년(1416) 병신(丙申) 친시(親試) 을과1등 壯元·세종 18년(1436) 병진(丙辰) 중시(重試) 을과3등 5위
“왜구침입 대비 백성들 兵器 소지해야” 해도찰방 시절 실용적 정책 제안
(해도찰방 : 지방의 비리를 감찰하기 위해 파견된 중앙의 관원. ‘행대’라고도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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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95권, 세종 24년 1월7일 기사 세번째 기사에는 ‘정지담이 왜구의 침입을 대비해 백성들이 항상 병기를 지닐 수 있도록 요청했고 이를 조정에서 허락했다’는 내용이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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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지담은 해도찰방으로 파견되자마자 지역의 실정을 면밀히 조사하고 조정에 사목을 올렸다. 세종실록 87권, 세종 21년 11월28일 임신 첫번째 기사에는 정지담이 올린 ‘군령을 엄히 세우기 위한 총 8개 항목’의 사목이 상세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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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실록 87권, 세종 21년 10월27일 임인 두번째 기사. 사헌부 장령 정지담이 세종 임금과 영의정 황희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전라도 지역에 행대를 파견할 것을 주장하는 내용이 상세하게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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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령 정지담이 행대 파견을 나가게 되자, 대간이 배척당하는 것을 우려한 장령 우효강이 임금을 찾아와 “우수한 인재를 외직에 보내는 것은 부당한 일”이라며 반대한다.

장원방 출신 정지담(鄭之澹)은 임금에게도 소신을 굽히지 않는 대쪽같은 관료이면서 업무능력 또한 탁월했다. 특히 사헌부 장령(掌令) 시절, 해도찰방(海道察訪)으로 파견되었을 당시 지역 실정에 맞는 현실적인 정책을 건의해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해도찰방은 충청·전라·경상도의 수군(水軍), 만호(萬戶), 천호(千戶)의 불법한 일을 규찰하고 병선(兵船)과 장비(裝備), 선군(船軍) 등을 검열하기 위해 중앙에서 파견했던 임시 관원을 일컫는다. 사헌부의 지평, 장령, 집의가 겸직하던 자리였다. 해도찰방 파견 당시의 정지담 스토리는 조선왕조실록에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 불가불(不可不) 보내야겠습니다

1439년(세종 21) 10월27일, 경복궁 사정전(思政殿) 처마에 매달린 햇살이 부드러웠다. 하지만 그 아래 관복 자락을 펄럭이며 다급히 걸어가는 사헌부 장령(정4품) 정지담의 얼굴엔 잔뜩 날이 서있었다.

‘전라도에 행대(行臺)를 보내지 말라 하셨다니, 대체 이 무슨 일인가.’

행대란 조선 전기에 지방으로 파견되던 사헌부 소속의 감찰을 일컬었다. 겸대(兼臺)의 다른 이름이기도 했다. 지방의 비리를 규찰하고 불법 행위를 단속하는 것이 주요 임무였다. 감찰 업무를 맡았기 때문에 ‘행대어사’라고도 불렸다. 그런데 바로 그 행대 건으로 정지담은 정색하고 있었다.


행대파견 꺼리는 세종 끝까지 설득
왜구에 시달리던 전라도 현실 직시
군령 바로잡기 위한 8개 규칙 제시

타협 싫어하는 강직한 성정이지만
훗날 탁월한 능력과 충심 인정받아
지사간원사·안동대도호부사 올라



당시 조정에서는 의창(義倉)에 관한 일로 골머리를 앓던 중이었다. 의창은 평시에 곡식을 저장해 두었다가 흉년이 들었을 때 백성을 구호하는 역할을 맡고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중요한 기관임에도 불구하고 그 운영이 중구난방에 주먹구구였다. 하여 사헌부에서 세종 임금에게 간했다.

“매년 봄·가을 행대를 보내 그 실태를 조사해야 합니다. 그 과정에서 운영의 잘못이 드러나면 감사와 수령에게 합당한 벌도 내려야 합니다.”

사간원에서도 힘을 보탰다. 의창을 보충하는 방책을 여섯 가지로 구분해 건의하고 나섰다. 당연히 행대에 관한 내용도 들어있었다.

“매년 겨울이나 혹은 격년으로 행대를 보내는 것이 좋겠습니다. 잘못했거나 위법한 것이 있는지 규찰하고, 비리가 밝혀지면 감사까지 함께 죄를 물어야 합니다.”

이후 행대 파견 문제는 의정부에서 상의를 거듭했다. 이러한 가운데 영의정 황희가 이의를 제기하고 나섰다.

“사헌부에서 충청·전라·경상 삼도에 행대를 보내야 한다고 하였습니다. 하지만 전라도는 제외시켜야 합니다. 전라도에 이미 경차관(敬差官)을 보낸 적이 있는 데다 안무사(安撫使)의 폐해 또한 심각합니다. 행대라고 다를 리 없습니다. 일단은 정지시켜야 합니다.”

경차관과 안무사 모두 특별한 임무를 가지고 각 도에 파견되는 관리였다. 그런데 당시 전라도 지역에 파견된 안무사의 경우, 과한 대접과 선물을 받는 등 문제를 일으키고 있었다. 황희의 의견에 세종도 수긍했다. 하여 정지담을 불러 이렇게 명했다.

“의정부에서 전라도에는 이미 사신이 빈번히 가고 있으니 행대까지 보낼 수는 없다고 알려왔다. 그리 알라.”

순순히 알았다고 할 정지담이 아니었다. 그에게도 반박할 논리가 충분했다.

“물론 전라도에서 그런 일이 있기는 합니다. 그렇다고 충청·경상 두 도와 차이를 둘 만큼 특별히 다를 것은 없습니다. 그러니 불가불 보내야겠습니다.”

불허하는 임금에게 ‘불가불’이라니, 그야말로 단호한 어조였다. 정지담이 말을 이어갔다.

“또한 양치란 자가 지영광군사(知靈光郡事)로 있을 때, 제 마음대로 창고를 열어 저지른 일이 한두 가지가 아닙니다. 그 죄가 결코 가볍지 않아 입건해야 하는 상황입니다. 심문의 정확성과 편의를 위해서도 행대를 보내 조사하는 것이 합리적입니다.”

하지만 세종도 물러서지 않았다.

“보내지 말라 했다.”

#2. 그렇다면 네가 가서 하라

임금의 반대가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행대는 결국 파견하기로 결정이 났다. 그런데 행대로 지목된 이가 바로 정지담이었다. 11월6일, 그새 쌀쌀해진 공기를 비집고, 이번에는 장령 우효강이 대전으로 향했다.

“장령 정지담을 해도찰방(海道察訪)으로 삼으신 뜻을 거두어주십시오. 물론 정지담이 가는 것 자체만 놓고 보면 시비할 일은 아닙니다. 그만큼 중요한 사안이기도 합니다. 하나 대간을 밖으로 보내는 일이 이번이 처음이 아닙니다. 사헌부의 우수한 인력이 자꾸만 유출되는 것은 심각한 사안이 아닐 수 없습니다. 아울러 이번 일이 후세의 본보기가 될 것이라는 점에서도 문제가 있습니다. 혹 뒷날에, 외부의 압력에 굴하지 않고 곧은 말을 과감하게 간한 대간을 이런 식으로 처리할까 염려됩니다.”

사헌부에서는 정지담의 행대(해도찰방) 파견을 ‘네 뜻이 정녕 그러하다면 네가 직접 가서 하면 되겠구나!’로 이해하고 받아들였던 것이다. 사헌부에서만 그렇게 판단한 것은 아니었다. 사간원에서도 같은 맥락으로 반응했다.

“지금 대간들이 잇따라 변방으로 보내지고 있습니다. 이러다가 대간을 소외시키고 배척하는 조짐이 일어날까 심히 걱정스럽습니다.”

하지만 세종은 자신의 뜻을 철회하지 않았다. 결국 정지담은 해도찰방이 되어 지방으로 파견됐다.

썩 개운한 분위기는 아니었지만 정지담은 해도찰방으로서 기민하게 움직였다. 내려간 직후인 11월28일에 벌써 각 포(浦·항구)에 대한 조사를 마치고 조정에 사목(事目)을 올리기까지 했다. 사목이란 지켜야 할 규칙을 이르는 말이었다. 군령을 엄히 세우기 위한 총 8개 항목의 사목은 그 즉시로 반영되었다. 특히 1442년(세종 24) 1월에 요청한 내용은 무척 실용적이었다.

“바닷가 고을의 백성들로 하여금 그 가진 재주에 따라 창·칼·활 등의 무기를 주어 연습하게 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병기를 농사 지을 때도 가지고 다니게 하여 불시의 일에 대비하도록 해야 합니다.”

툭하면 왜구에게 들들 볶이던 당시 상황을 반영한 안건이었다. 당연히 그 또한 조정에서 그대로 따랐음은 물론이었다. 이론이 아닌 지역 실정에 맞는 정지담의 정책들은 그렇게 꾸준히 빛을 보았다. 파견될 때 조금 어수선하긴 했어도 능력·안목·투지가 필요한 자리에 우수한 인재가 배치된 결과였다.

#3. 시 한 수에 갖은 소회를 실어

境靜民風厚 雲深洞府幽(경정민풍후 운심동부유)

지경이 고요하니 백성 풍속 고요하고/ 구름 깊으니 동네의 관아 그윽하네.


해도찰방의 소임을 다하고 있던 장령 정지담은 조용히 시 한 수를 읊었다. 타협을 싫어하는 강직한 성정과는 다르게 정지담은 시문에 탁월했다. 관찰력과 표현력이 뛰어나다는 뜻이었다.

“마음 푸는 데 시만 한 것이 없지.”

고산현(高山縣, 지금의 전북 완주군 고산면)에서 동쪽 위로 5리쯤 거슬러 올라가면 고을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명당이 있었다. 정지담은 일이 고단하거나 속이 시끄러울 적마다 그렇게 산등성이에 올라 시를 지었다. 하지만 그날은 느꺼웠다. 자신이 돌보고 있는 고을의 평화가 뿌듯하고 흐뭇했다. 시가 절로 흘러나오지 않을 수 없었다.

그렇게 열심과 충심으로 해도찰방의 직을 수행한 정지담은 1446년(세종 28), 지사간원사(知司諫院事)가 되었다. 지사간원사는 사간원에 소속된 종3품의 관직이었다. 이후 정지담은 한 번 더 승진해 정3품의 안동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事)로 임명받았다. 대도호부사는 대도호부의 장관직이었다. ‘세종실록지리지’에 따르면 당시 정지담이 활동하던 시기에는 총 4곳에 대도호부가 있었다. 고려 후기부터 지정되어있던 안동(지금의 경주)과 강릉, 그리고 세종이 새로 지정한 함경도 영흥(永興)과 평안도 영변(寧邊)이었다. 구역이 방대한 만큼 책임도 막중했다. 실제로 그가 목민관으로서 어떠한 가치관을 가지고 있었는지 ‘소루(召樓)’라는 시를 통해 짐작해 볼 수 있다. ‘소루’는 정지담이 밀양의 영남루(嶺南樓)를 지나면서 쓴 시였다.



영남 천리 길에 가을이 또 돌아오는데/ 북녘을 바라보니 대궐로 가는 길이 열렸구나./ 작은 힘이나마 산하 같은 성덕을 도와야 하지,/ 쉽사리 귀거래를 읊을 것은 아니로다.



안빈낙도, 음풍농월이나 하자고 지방 외직으로 가는 것은 아니라는 뜻이었다. 정지담은 고을을 잘 다스리는 일이 백성을 향한 덕(德)이자 곧 임금을 향한 충(忠)임을 정확히 인식하고 있었던 것이다. 안동대도호부사를 마지막으로 정지담은 정계에서 물러났다. 훗날 영남사림의 영수 김종직(金宗直·1431~1492)은 정지담에 대해 ‘이존록’(彛尊錄, 아버지 김숙자의 행적에 관한 기록들을 모아 편집하고 간행한 책)에 이렇게 기록해두었다.

‘김공(金公) 치()의 사위인데, 병신년 문과에 장원하였고 벼슬은 안동대도호부사에 이르렀다.’

짧은 기록이지만 정지담이 선산, 특히 장원방을 빛낸 인물이라는 점을 높이 평가하고 있는 대목이다.

글=김진규<소설가·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초빙연구원>
▨참고문헌=국조문과방목(國朝文科榜目), 조선왕조실록, 성리학의 본향 구미의 역사와 인물
공동기획:구미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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