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혁의 중년 남자 이야기] 과거로의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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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08   |  발행일 2017-09-08 제39면   |  수정 2017-09-08
그때 그 시절이 나를 ‘토닥토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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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초등학교를 다닌 다세대 주택이 밀집해 있는 대전 대흥동의 한 골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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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직장이 있었던 전북의 한 면소재지 마을. 이 곳에서 시작한 첫 사업은 실패로 끝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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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은 문을 닫은 어릴 때 고향집 부근에 있던 문방구. 이곳에서 장난감을 훔치다 걸려서 벌을 선 기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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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찻길은 인생과 비슷하다. 끊임없이 이어지고, 한 방향으로 흘러간다. 중간중간 쉬어가기도 한다. 종착역에 도달하면 열외없이 내려야 한다. 그래서 ‘박하사탕’이라는 영화 속 주인공이 굳이 기찻길 철로 위에서 그렇게 외쳤던 거다. “나, 돌아갈래!” 인생에 왕복이란 존재하지 않는다. 모두에게 편도뿐인 길.

그 때 그 시절로 돌아갈 수 있다면? 타임 슬립을 소재로 하는 영화나 드라마는 많다. 누구나 한 번쯤은 꿈꿔보는 일이다. 고백하지 못한 첫사랑을 찾아갈 수도, 실패의 원인을 찾아 다른 선택을 할 수도 있다. 상상만으로도 행복과 후회의 감정이 교차한다. 하지만 시간 여행이란 현실 속에서는 불가능하다. 시간을 거스를 수 없다면 공간은 어떠한가? 공간 속에는 시간의 흔적들이 남기 마련이니까.

중년 남자 이야기, 그 다섯 번째 시간. 누구에게나 과거는 존재한다.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은 이상, 기억을 상실하지 않는 한. 과거는 아련하기도 하고, 흐뭇하기도 하며, 때론 지워버리고 싶을 만큼 안타깝기도 하다. 그때 좌회전이 아닌 우회전을 택했더라면, 그때 조금 더 열심히 노력했더라면. 과거로 돌아가 인생을 바꿀 수는 없는 일이지만 과거의 기억을 떠올려 보는 것은 앞으로의 인생에 도움이 된다. 오늘의 주제는 바로 과거로의 여행이다.

서두에 밝혔듯이 시간을 되돌리는 것이 아니라 과거의 공간 속으로 떠나보는 것이다. 어릴 적 살던 슬레이트 지붕의 다세대 주택, 두레박으로 우물물을 길어올리던 외할머니 집, 밤새워 공부하던 집 앞의 작은 독서실 등. 재개발로 인해 많은 곳이 사라졌지만, 운이 좋으면 보존상태가 양호한 마음속 유적지를 발견할 수 있다.

먹고 살기도 바쁜 세상에 이 무슨 한가로운 소리냐고? 그 반대다. 필자가 과거의 장소를 찾아나서는 순간은 삶의 고단함에 경추가 짓눌릴 때다. 여러 가지 일로 머리가 복잡할 때, 열정을 소진해 껍질만 남았다고 느낄 때 떠나는 거다. 비우기 위해서 때론 채우기 위해서 우리는 지나간 시간의 장소를 찾을 필요가 있다.

삶의 고단함에 경추가 짓눌릴 때면
비우기 위해 때론 채우기 위해 훌쩍

가난에도 꿈 키우던 유년시절의 그곳
내 안에 숨쉬는 소년 존재 확인 ‘큰힘’
사회 초년병으로 큰 실패 맛본 그곳
나태해진 일상에 의욕·열정 ‘재충전’
현재·미래의 나를 응원하는 시공간들


필자가 주로 찾는 장소는 두 종류다. 한 곳은 어린 시절의 기억이 담긴 곳이고, 다른 한 곳은 사회에 나와 뼈아픈 실패를 경험한 곳이다. 인생의 나침반이 방향을 못 찾고 빙빙 돌 때면, 어릴 적 꿈을 키우던 소년을 찾아나선다. 나태해지거나 슬럼프에 빠져 허덕일 때는 부족했기에 좌절을 겪었던 사회 초년병을 찾아나선다.

먼저 유년 시절의 그 곳부터. 얼마 전 우연히 주민등록초본 전체를 떼어야 할 일이 있었는데, 고등학교 전까지 이사만 스무 번을 넘게 다녔다. 대부분의 가정이 셋방을 전전하던 시절이었다. 어느 집에선가는 이삿짐을 다 풀기도 전에 다시 짐을 쌌던 기억도 난다. 세간이라 해봤자 빤한 것이기에 리어카(손수레)로 몇 번 왔다갔다하는 이사였다.

그렇게 옮겨다니던 집들이었지만, 비교적 생생하게 기억에 남아있다. 슬레이트도 아닌 플라스틱 재질의 처마 밑에 앉아 내리는 비를 바라보던 기억. 방 두 칸짜리 이층 독채로 이사 가던 날, 현관에 구렁이 한 마리가 똬리를 틀고 있던 기억. 천장을 밤새도록 뛰어다니는 쥐들 때문에 잠 못 이루던 골방의 기억. 그럼에도 그때의 나는 꿈을 꾸었고, 희망의 존재를 믿었다.

가난했던 그 시절, 모든 게 귀했고 부족했다. 단칸방에 네 가족이 모여 아웅다웅 살면서 어른이 되면 방이 여러 개 있는 집을 지어야겠다는 꿈을 꾸었다. 주인집 눈치 보느라 소리 죽여 살지 않아도 되는 세상을 꿈꿨다. 단골 슈퍼의 외상값 때문에 일부러 동네를 한 바퀴 크게 돌아올 필요없는 그런 미래를 꿈꿨던 것이다. 그래서 그 공간에서 더욱 이를 악물었는지 모른다.

예전에 살던 집들을 찾아가 보면 흔적조차 사라져버려 그 자리에 우뚝 선 아파트나 고층 건물만 하릴없이 둘러보고 오는 경우가 많다. 하나, 삼십년 전의 모습을 그대로 유지하고 있는 곳도 상당수 있는데, 그럴 때는 녹슨 대문을 열고 나오는 유년 시절의 나를 마주칠 것 같아 가슴이 뛴다.

그때 그 소년의 눈빛은 총명하게 빛났고, 머리는 맑았으며, 몸짓은 가벼웠다. 어떤 색깔도 받아들일 수 있는 흰 도화지 같은 영혼. 머리가 희끗해지고 노안이 서서히 찾아오는 지금의 나와 겹치는 부분이라곤 하나도 없을 것이다. 하지만 우리는 알고 있다. 내 안에 아직 숨쉬고 있는 소년의 존재를. 길을 잃고 멍하니 서 있다고 느껴질 때, 과거의 장소는 내 안의 소년을 불러내기 적합한 공간이다.

두 번째로 내가 즐겨 찾는 장소는 첫 사업(?)이 망했던 장소다. 선배가 경영하던 곳을 인수해 의욕적으로 시작했으나, 미천한 실력과 형편없는 마인드, 그리고 지나친 자만심으로 인해 결국 문을 닫았다. 일 년 남짓한 시간에 빚더미에 올라 눈물을 머금고 그곳을 떠났다. 반드시 성공해서 돌아오리라, 되뇌며.

몇 해가 지나 자리를 잡고 안정이라는 함정에 빠졌을 때, 다시 그 곳을 찾았다. 면 단위의 시골 마을이 대부분 그러하듯 특별히 달라진 건 없었다. 5일마다 장이 서고, 푸짐하게 고기를 얹어주는 국밥집도 한결같다. 내가 일하던 쌀집 이층 건물도 그 시절에 머물러 있다. 간판 아래 굵은 거미줄까지 예전 그대로다.

그 후로 일이 잘 안 풀릴 때나 초심을 잃었다는 생각이 들 때, 너무 지쳐 쉬고 싶을 때면 종종 찾아간다. 마치 내 근원이 그곳에서 시작된 것처럼. 어미의 자궁을 그리워하는 한 마리 어린 짐승처럼. 그 곳에 다녀오고 나면 이상할 정도로 의욕과 열정이 다시 생긴다. 다시는 실패하지 않겠다는 의지와 좌절을 맛본 경험에서 비롯된 것일까?

시간을 거슬러 떠나는 과거로의 여행은 현재와 미래의 나를 위한 시간이다. 인디언들은 말을 타고 달리다 잠시 멈춰서 영혼이 따라오길 기다린다고 한다. 앞으로 한 걸음 나아가기 위해 어디서 왔는지 잠시 돌아보는 소중한 순간. 앞으로도 시간을 거슬러 공간을 찾는 여행은 계속될 것이다. 나의 존재가 더 이상 시공에 구애받지 않는 그 날까지.

칼럼니스트 junghyuk2@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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