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침묵하는 다수’는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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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9-02   |  발행일 2017-09-02 제23면   |  수정 2017-09-02
[토요단상] ‘침묵하는 다수’는 있을까
최병묵 정치평론가

전두환 전 대통령 회고록 2권 631쪽에 이런 대목이 나온다. 본인이 대통령직선제를 받아들이도록 1987년에 노태우 민정당 대표를 설득하는 장면이다. 1971년 대선을 예로 들었다고 했다. “박(정희) 대통령은…3선개헌을 강행한 뒤여서 인기가 없었던…노 대표는 박 대통령보다 얼굴도 잘 생기고, 말도 잘하고, 정치에 때가 묻지 않아 신선하고 인상도 좋다. …5공화국이 많은 국정 성과를 거두고 있지 않은가.”

공직사회와 민심 모두 ‘전통적 여권’에 유리한데, 다만 정치적 실적이 없으니 당시 국민적 요구인 대통령직선제를 전격 받아들이면 승산이 있다는 것이 전 전 대통령의 설득 논리였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노 대표가 당시 대통령직선제 수용(6·29선언)을 선뜻 결정하지 못한 이유는 낙선 가능성 때문이다. 그도 그럴 것이 직선제가 되면 YS(김영삼), DJ(김대중)가 후보로 나올 것이 명백하니 망설였을 것이다. 전 전 대통령은 표현을 직접 쓰진 않았지만, ‘침묵하는 다수(silent majority)’의 유권자를 믿으라는 말이다.

87년 대선은 정말 ‘침묵하는 다수’의 승리였을까. 당선된 노 후보가 얻은 표는 36.6%고 김영삼 28%, 김대중 27%였다. 양김씨가 단일화했다면 노 후보의 승리는 없었다고 봐야 한다. 양 김씨의 독자 출마를 확신했다면 적어도 양 김씨가 각각 얻은 표보다 많은 ‘상대적 다수’의 영역이 있다는 점은 확인된 것이다. 당시 야당 지지자의 목소리가 워낙 커서 민정당 재집권은 무망할 것처럼 느껴졌다. 결과는 목소리가 작은 쪽의 승리였다.

‘침묵하는 다수’를 정치적으로 얘기할 때 작년 미국 대선을 예로 드는 사람들이 많다. 트럼프 대통령이 “사일런트 머조러티(silent majority)가 돌아온다”고 주장했을 때 미국의 주류(主流) 세력은 믿지 않았다. 실제 그런 일은 벌어졌다. 그 한복판에 있던 사람들이 ‘침묵’했기에 알아채지 못했을 뿐이다.

문재인정부의 국정운영 지지율이 70%대를 유지하자 대한민국의 ‘정치적 주류’ 사이에서 다시 침묵하는 다수를 거론하기 시작했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대표도 ‘여론조사에 응답하지 않는 보수’를 말했다. 지역적으로 영남 출신, 생활수준 중상계층의 상당수는 “주변에 더불어민주당 지지자가 없는데. 지금 나오는 여론조사 믿을 수 있나”라며 의문을 제기하고 있다. 한 여론조사 전문기자는 20%를 겨우 넘는 응답률(조사에 답하겠다고 전화를 계속 받아주는 사람의 비율)을 들먹이며 과장(誇張)일 수 있다는 입장을 보였다. 이런 사람들의 생각 속을 흐르는 전제가 바로 ‘침묵하는 다수’론(論)이다.

정치부 기자와 분석가로 30년 넘게 생활한 필자가 보기에는 ‘침묵하는 다수’라는 주장 자체가 과장이다. 87년 노태우 후보가 얻었던 36.6%는 내놓고 말할 정도는 아니지만 적어도 ‘정신무장’은 돼 있었다. 민정당 정부의 경제 운용실적이 좋았던 것이 사실이고, 민정당 정권에도 구(舊)정치에 물들지 않은 후보가 있었다. 대놓고 지지의사를 밝히기만 어려웠을 뿐이었다.

지금은 어떤가. 양극화로 빈부격차가 심해져 저소득층의 불만이 쌓여있는 상태인 데다 중상층은 전(前) 정부의 세금 쥐어짜기에 입이 나와 있는 상태다. 게다가 4년6개월 전 믿고 맡겼던 정부권력을 무자격자와 공유하는 바람에 지지자들은 공황상태에 빠져있다. 이마저도 “그래도”와 “이제는”으로 나뉘었다. 상처를 보듬어줄 지도자는 보이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 중에서도 문재인정부가 잘만 한다면 굳이 반대할 이유가 없다는 사람이 늘어났다는 것이 필자의 판단이다. 문재인정부의 ‘중도 성향 반대자’에서 ‘비판적 지지자’가 된 셈이다. 이들이 비판은 하지만 대안이 없기에 지지하느냐고 물었을 때 굳이 아니라고 하지 않는다. 이래서 이들은 하루아침에 돌아설 수도 있다. 이들의 전향(轉向)은 귀향(歸鄕)인 셈이어서 도덕적 부담도 없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필자의 생각에 현재 ‘침묵하는 다수’는 없다. 줄곧 현 자유한국당을 지지해온 세력, 보수의 새 길을 모색하는 세력, 트라우마로 정치를 외면하는 세력이 있을 뿐이다. 이들조차 흩어져있고, 다 모아도 더 이상 다수가 아니다.최병묵 정치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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