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규홍의 시시콜콜 팝컬처] 학교괴담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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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25   |  발행일 2017-08-25 제39면   |  수정 2017-08-25
공포는 멀리 있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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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여고괴담’

어느덧 여름이 가고 가을이 찾아올 때가 됐다. 더위가 누그러지는 건 반갑지만 여름에만 누릴 수 있는 것들을 한껏 즐기지 못했다는 아쉬움이 있다. 그 중 하나가 납량특집이라는 말을 제목 앞에 붙이고 등장하는 갖가지 공포물이다. 꽤나 즐겨온 납량콘텐츠를 올해는 바빠서 어느 하나 제대로 즐기지 못했다. 영화관이야 뭐 1년 내내 호러무비 상영이 이어지지만, TV는 여름밤에 납량물들이 몰려 방송된다. 그런데 오싹하도록 무서운 걸 체험하면 정말 더위가 사라지는 것일까? 나의 ‘시시콜콜 팝컬처’는 이 문제를 서브컬처라는 관점에서 접근해보려 한다.

“옛날 옛적 어느 시골마을”로 시작되는
‘전설의 고향’류 전설이나 민담과 달리
요즘 괴담은 “지금 여기 우리학교”처럼
일상의 구체적 시공간 배경이라 더 섬뜩

살벌한 입시경쟁 앞에 내몰린 아이들
함께하는 학교에서 자신은 혼자이며
어디에도 안식처가 없다는 사실의 반영
더 무서운 건 자주 바뀌는 입시제도일 듯


이번에 다루는 주제인 ‘학교괴담’ 역시 학생들 또래가 공유하는 일종의 하위문화다. 본론에 들어가면서 먼저 공포물과 연관된 문화현상 몇 가지를 살펴보자. 요게 아이와 어른이라는 세대별로 나누어지는 경향이 있다. 새로운 정보에 호기심이 크다고 볼 수 있는 어린이, 청소년은 막 공개되거나 새롭게 가공된 콘텐츠에 열광한다. 이에 비해 기성세대는 지나간 시절의 어느 한때에 좌표를 찍고 그 매개가 된 대중문화를 되새기는 일이 많다. 지금도 어느 연령대 이상에서 회자되는 ‘전설의 고향’ 이야기까진 굳이 할 필요가 없겠다. 그 시절 내게 더 무서웠던 건 ‘전설따라 삼천리’라는 라디오 드라마였다. 어린 시절 엄마아빠 사이에 누워서 잠을 청하던 시간에 드라마 시작을 알리는 드뷔시의 곡만 나와도 이불 속으로 파고들던 겁쟁이였다. 매회 다른 이야기를 보여주던 외화시리즈 ‘환상특급’도 일주일을 기다려봤지만, 가장 무서웠던 프로그램은 ‘토요 미스터리 극장’이었다. 이 프로가 왜 그리 무서웠냐 하면 실화를 바탕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다.

학교를 무대로 벌어지는 무서운 이야기도 대부분 그와 같은 동시대성에 호소하고 있다. 이것은 ‘옛날 옛적 어느 시골 마을’로 시작되는 전설이나 민담과 달리 ‘지금 여기 우리 학교’라는 구체적인 시공간에서 벌어지는 공포다. 학교괴담은 이른바 도시전설의 하위장르로 분류될 수 있지만, 도시나 학교 모두 근대화 이후에 틀을 갖춘 문물이 아닌가. 내가 들었던 오싹한 이야기는 어머니가 고등학교 때 음악선생님이 지병이 심해서 세상을 떠났는데, 비가 세차게 오는 날이면 음악실에서 죽은 선생님이 피아노 앞에 앉아 아베마리아를 연주했단 내용이다. 그걸 보고 까무러친 학생들이 여럿이 됐다는 이야기가 참이든 거짓이든 간에 그때 다니던 중학교 음악선생님의 창백했던 얼굴과 겹쳐서 더 두려웠던 일이 있다. 이처럼 학교괴담은 지나간 확인불명의 내용이 실재 일상과 결합될 수밖에 없는 시공간적 특성을 가진다.

문화 연구를 하면서 내가 읽은 글 중에 학교괴담에 관한 가장 학술적(?)인 연구성과는 김종대 선생이 15년 전에 민속학적 관점에서 썼던 ‘한국의 학교괴담’이다. 하지만 난 이 칼럼을 쓰기 전에 그 책 대신 초등학교 앞 문방구에 파는 ‘학교 미스터리’(김언정 글, 정석호 그림)를 사서 읽었다. 나온 지 몇 해 됐지만 아이들 사이에 입소문을 타고 아직도 인기가 있는 ‘학교 미스터리’는 학교괴담을 유형별로 기막히게 잘 정리해 놓았다. 이 만화책의 내용은 요약하면 이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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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학교 운동장에 서있는 이순신 동상에 장난을 치다 끔찍한 저주를 받은 개구쟁이들. 둘, 학교 체육 도구실에 놓인 거울의 흉흉한 비밀. 셋, 밤 12시만 되면 12개가 13개로 늘어나는 학교 옥상 계단. 넷, 학교에 나타난 검은 고양이의 복수. 다섯, 산사태로 죽은 아이들이 뛰노는 산골 폐교. 여섯, 다른 차원으로 빨려 들어가는 소용돌이가 생긴 교실. 일곱, 따돌림을 받다 죽은 아이의 영(靈). 여덟, 용이 되려던 학교 연못 이무기의 노여움 때문에 소풍날마다 내리는 비. 아홉, 미술실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인사건.

자, 이렇게 글로만 요약해도 만화를 안본 독자들이 대강 머릿속에 그려지는 장면이 있을 것이다. 이 만화의 독자층인 아이들이 보면 무서움을 탈지 모르겠는데, 어른인 우리는 공포감에 휩싸일 수 없는 이유가 있다. 그건 괴담의 각 에피소드가 모두 꽤 긴 시간에 걸쳐 정형을 이룬 패턴이라서 그렇다. 물론 이 이야기를 기본재료로 삼아 갖가지 기술과 착상이 들어가면 진짜 무서운 공포담이 되긴 한다. 가령 일곱 번째 이야기는 영화 ‘캐리’나 ‘여고괴담’의 뼈대가 됐다. 이른바 왕따 아이가 불행의 주인공인 예가 많지만, 이에 못지않게 공부에만 악착같이 매달렸던 아이가 유령으로 변형되기도 한다.

운동장 동상 괴담은 이순신 장군과 쌍벽을 이루는 유관순 열사(미국에는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가 있다. 조금씩 세세한 내용은 다르지만 유관순의 비밀을 모두 알게 되는 순간에 엄청난 파국이 벌어진다는 암시는 괴담을 믿되 이성적인 분석을 하지 말라는 경고와도 같다. 한편, 내가 들었던 음악교사 혼령 이야기처럼 학교의 특별실도 단골 소재다. 음악실엔 특히 작곡가들의 초상화가 주인공이 되는 경우가 많다. 난 쇼팽이 왜 그렇게 무섭던지. 흰 석고상들이 즐비한 미술실, 거울 속에 또 다른 누군가가 춤추는 무용실. 최근에는 컴퓨터실까지 합세하고 있지만, 이 영역에서는 단연 과학실이 최상급 레벨이다. 왜 그런지는 해부한 동물 표본과 해골 모형을 떠올려 보면 이해가 될 듯 싶다.

여기 빠진 곳이 한 군데 있다. 화장실이다. ‘빨간 휴지 파란 휴지’로 대표되는 화장실의 공포담은 재래식 화장실이 사라지고 수세식 화장실로 거의 바뀐 지금도 이어지고 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혼자 갇혀 옷을 내린 무방비 상태에서 맞닥트리는 상황에 대한 불안과도 같다. 이는 어쩌면 하루를 가족보다 반 아이들과 더 오래 함께 있어야 하는 학교에서, 결국 나는 나 혼자일 뿐이며 살벌한 입시경쟁 앞에서 안식을 찾을 수 있는 공간은 학교 어디에도 없다는 사실이 만든 이야기가 아닐까. 정말 우리 아이들에게 무서운 괴담은 내일을 장담할 수 없이 매 하루를 버티는 와중에, 몇 년생 이후는 피해를 입느니 마느니 하며 자주 바뀌는 입시제도일지도 모른다. P&B 아트센터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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