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10> 몸 낮춘 사람들의 높은 집 - 청송 현동면 오체정, 낙금당, 겸와재 그리고 매계정과 월산재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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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23   |  발행일 2017-08-23 제14면   |  수정 2021-06-21 17:12
병보천과 松林을 보며… 다섯 형제는 德人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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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현동면 개일리에 자리한 오체정 전경. 오체정은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증손인 성재공이 아들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작은 정자로, 소나무가 제 멋을 드러내며 여유롭게 숲을 이룬 풍경이 장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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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금당은 낙금(樂琴) 남성로(南星老)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1880년 건립한 사당이다. 후원에는 준공 당시 기념으로 심은 대추나무가 자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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겸와재는 운강공의 차남인 남수(南遂) 선생이 시냇물을 벗 삼아 학문을 가르치던 곳이다. 많은 인재를 배출해 월매서당이라 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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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현동면 월매리 매계정은 매계(梅溪) 남지훈(南之薰)의 덕을 기려 세운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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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산재는 의성김씨 재사로, 월계(月溪)공과 공의 아들 휘(諱) 정(玎)을 모시고 있다.


멋있는 송림이다. 소나무 많은 청송이지만 이처럼 평평한 땅에 하나하나가 제 멋을 드러내며 여유롭게 숲을 이룬 모습은 드문 것 같다. 넉넉한 숲길을 관통하는 동안 은근한 보호와 환영의 느낌을 받는다. 송림은 청송의 가장 남쪽, 면봉산을 향해 약 7㎞나 깊숙이 파고드는 골짜기의 입구에 형성되어 있다. 골의 수문(守門)인 셈이다. 문 안에는 크게 두 개의 마을이 있다. 해가 열린다는 개일리(開日里)와 반달 형상의 땅에 매화 모양의 능지가 있다는 월매리(月梅里). 그곳은 은벽한 골짜기를 효와 덕으로 일구며 살아온 사람들의 마을이다.

성재공이 아들 교육위해 지은 오체정
담장 없고 사방 향해 열린 구조 눈길

월매천 자락 당포마을 입구 낙금당
건립 때 심은 대추나무 아직도 있어

남수선생의 별서이자 학원인 겸와재
많은 인재배출…월매서당으로도 불려

 

 

#1. 산앵두나무 꽃 같은 우애와 효를 기리는 정자, 오체정

송림의 가장자리 언덕에 정자 하나가 올라 서있다. 강건한 소나무들 사이 볕뉘를 받으며 아려하게 서있다. 곁에는 3채의 작은 부속건물이 있는데 정자와 함께 ‘ㅁ’자형으로 둘러서서 화목하고 평화스러운 모습이다. 정자의 좌측 아래에는 병보천이 흐른다. 구암산에서 발원한 병보천은 송림을 크게 감싸며 이곳에서 초승달처럼 휘어 북향한다. 담장 없이 자유로이 열린 누마루에 몇몇 사람이 올라 있다. 사람의 숨과 체온이 마치 자신의 것인 양 정자는 생명감이 넘친다. 현판은 정면과 측면 두 군데에 걸려 있다. ‘오체정(五亭)’이다.

‘산앵두나무 체()’는 시경(詩經)의 상체지화(常之華)에서 따온 말로 형제간의 두터운 우애를 상징한다. 여기서 오체는 영양남씨(英陽南氏) 가문의 자훈(自熏), 응훈(應熏), 유훈(有熏), 필훈(必熏), 시훈(是熏)을 가리킨다. 이들은 청송 입향조인 운강(雲岡) 남계조(南繼曺)의 증손인 성재(誠齋) 남세주(南世柱)의 다섯 아들이다. 형제는 1660년대의 인물로 학업과 덕망이 높고 효가 깊어 원근에서 하늘이 내린 효자라 칭송했다 한다. 원래 오체정은 성재공이 아들들을 교육시키기 위해 지은 작은 정자였다. 이후 1734년 자훈의 손자인 도성(道聖)이 제종들과 합의해 건물을 보수하고 할아버지 5형제를 기려 오체정이라 편액했다 전한다.

오체정은 정면 5칸, 측면 3칸의 일자형 겹집으로 평면 구성이 특이하다. 앞쪽은 왼쪽부터 2칸 대청, 2칸 온돌방, 툇마루 순으로 구성되어 있고 뒤쪽은 그 역순이다. 앞면의 대청은 뒷면의 툇마루와 만나 병보천을 향해 열려 있고, 뒷면의 대청은 앞면의 툇마루와 만나 마을 입구의 송림을 바라본다. 대청에 면한 온돌방의 측면에는 분합문을 걸어 내외 공간을 확장할 수 있게 했는데 팔각빗살무늬 문으로 한껏 멋을 내었다. 온돌방의 앞쪽 2칸에만 쪽마루를 달아내고 나머지는 계자난간을 둘렀으며 안쪽은 네모기둥을 세우고 바깥쪽은 둥근 기둥을 세웠다. 누마루의 하부기둥은 밤나무, 상부기둥은 소나무를 사용했다고 한다. 부속건물들은 누군가의 거처다. 여기저기 쌓인 살림들은 거리낌없는 일상을 고스란히 보여준다.

북쪽에는 멀리서부터 이곳까지 가지런히 이어지는 송림의 우듬지가 보인다. 남쪽에는 병보천을 가로지르는 만수교와 개일리의 환한 골짜기가 보인다. 정자는 사방을 톱아보며 골짜기의 수문 속에서 수문장처럼 자리한다. 오체정에는 담장이 없다. 주민들에게 오체를 떠올리는 일은 매우 가깝고 일상적인 일이다.



#2. 산앵두나무가 있는 물가의 집, 낙금당

면봉산에서 발원한 월매천이 만수교 아래에서 병보천과 만난다. 골짜기 속으로 나가는 길은 월매천과 나란하고 골짜기는 넓어 ‘해가 열린다’는 뜻의 개일(開日)의 의미가 확연하다. 현대식 집과 시멘트벽들을 무심히 지나치다 야무지게 오뚝한 기와지붕을 발견한다. 마을의 정면 한가운데에 단정한 담장으로 둘러싸인 건물이 옆집과 어깨를 겯고 자리하고 있다. 낙금당(樂琴堂)이다.

낙금당은 운강공의 10세손인 낙금(樂琴) 남성로(南星老)의 유덕을 기리기 위해 유림들과 문중에서 경모계(敬慕契)를 조직해 1880년에 건립한 사당이다. 공의 평소 거처였던 사랑채를 개수해 구재(舊材)를 고스란히 써서 지은 집이라 한다. 낙금공은 병인양요(丙寅洋擾) 때 군량미를 지원하고 향리의 가난한 사람들을 구제했으며 만년에는 성리학을 강학하여 후진을 육성한 학자였다.

단아하고 정갈한 모습의 낙금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건물이다. 가운데 2칸 대청을 두고 양측에 온돌방을 두었는데, 왼쪽방과 대청의 전면에만 툇마루를 놓았다. 오른쪽 방은 툇마루 없이 전체가 방이고 왼쪽 방은 뒤편에 반 칸 규모의 공간을 달아내 양쪽 방이 역대칭인 구조다. 낙금당 후원에는 몇 그루의 대추나무가 자라고 있다. 그중 한그루는 1880년 낙금당 신축 때 준공 기념으로 심은 것이다. 나무는 1991년에 죽은 듯했지만 1993년 보존 조치 후 다시 생기를 얻었다고 한다.

낙금공은 처음 이 땅에 들어와 기와집을 짓고는 마을 이름을 ‘당포(棠浦)’라 명명했다 한다. ‘당(棠)’은 팥배나무 또는 산앵두나무를 뜻하니 ‘체()’와 그 뜻이 닿아 있다. 어쩌면 당포란 오체의 유덕을 간직한 공의 이상향이 아니었을까.



#3. 소박한 별서이자 학원, 겸와재

당포마을을 지나면 월매리가 시작된다. 점점 좁아지는 월매천을 거슬러 점점 더 깊은 골짜기로 나아갈수록 마을은 드물어진다. 고적마을을 지나 골짜기의 끝에 가까워지는 고요한 길가에 겸와재(謙窩齋)가 있다. 월매천 너머 언덕진 자리다. 침류헌(枕流軒) 현판이 걸린 정자 한 동이 근래에 보수된 듯 말끔한 모습으로 자리하는데 그 곁에는 주사채와 대문채가 붕괴된 상태로 방치되어 있다.

겸와재는 운강공의 차남인 남수(南遂) 선생이 기거하던 곳이다. 창건 연대는 정확히 알 수 없으나 1700년대 전후일 것으로 짐작된다. 침류헌은 정면 3칸, 측면 2칸 홑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후면 3칸은 방이고 전면은 마루인데, 마루 양쪽에 벽을 세우고 문을 달았다. 담장 너머로 솟구친 은행나무와 물소리 맑고 높은 월매천, 하얀 마을길과 사과밭, 보현산 자락이 시원하게 펼쳐진 전경을 가진 건물이다.

남수 선생은 이곳에서 시냇물을 벗삼아 학문을 가르쳤다고 한다. 겸와재는 많은 인재를 배출해 일명 월매서당이라 불린다. 안내문에는 이곳을 마을 ‘입구’라 적고 있다. 월매마을은 아주 멀지도 그리 가깝지도 않다. 홀로 배산임수(背山臨水)하고 산자수명(山紫水明)한 겸와재는 선생에게 소박한 열락의 별서였고, 동시에 자신의 뿌리를 널리 자라게 하는 학원(學園)이었다.



#4. 월매계곡의 매계정과 월산재

골짜기의 끝은 월매마을이다. 마을 경로당 뒤에 매계(梅溪) 남지훈(南之薰)의 덕을 기려 세운 매계정(梅溪亭)이 있다. 매계공은 운강공의 현손이자 유행(儒行) 남민주(南旻柱)의 아들로 어릴 때부터 독서를 게을리하지 않았고 특히 인륜도덕을 중시해 제자들을 가르칠 때도 늘 인덕의 함양을 강조했다 한다. 대산(大山) 이상정(李象靖)은 ‘남지훈이야말로 진정한 공부를 하는 사람(實學人)’이라 칭송했다.

매계정은 200여 년 전에 처음 세워진 건물로 그간 많이 훼손되어 2000년에 후손들이 뜻을 모아 중건했다 한다. 정면 3칸 측면 1.5칸에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대청을 중심으로 양쪽에 방이 있고 전면은 계자난간을 두른 툇마루다. 지붕은 고기와형 강판지붕을 올렸다. 중건 당시 후손들은 용도에 맞게 규모를 정하고 편리를 도모하되 야박하지도 않고 사치스럽지도 않도록 조심했다 하는데, 과연 실학인의 후손답다.

마을 끝 계류 가에는 의성김씨 재사인 월산재(月山齋)가 있다. 선조 초에 현서면의 도동에서 이곳으로 이거해 온 월계(月溪)공과 공의 아들 휘(諱) 정(玎)을 모신 재사다. 월계공의 휘(諱)는 몽기(夢麒), 자(字)는 중상(仲祥)으로 월매리의 자연 속에서 책 읽는 일에만 뜻을 두었는데,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의병을 일으켜 전장으로 나갔다고 한다. 개일, 월매의 긴 골짜기에 먼저 가장 깊이 자리했던 분이 월계공인 셈이다. 공의 아들은 청산(靑山)현감 겸 청주진영의 병마절도도위(兵馬節度都尉)를 지냈다.

월산재는 정면 3칸 측면 1.5칸 규모로 겹처마 팔작지붕 건물이다. 전면에 촘촘한 격자무늬 미서기 문이 설치되어 있는데 안쪽은 3칸 방과 긴 툇마루로 구성되어 있으리라 짐작된다. 월계공 부자의 묘소는 모두 마을 뒷산에 자리하고 있다. 월산이라 편액한 것은 공의 뜻이었다 한다.

반월의 지형에 매화 형상의 능지가 있어 월매라지만, 매계정과 월산재를 더해도 월매다. 매계정과 월산재는 같은 방향 같은 곳을 본다. 마치 삿갓을 펼친 듯 묘한 봉우리, 화룡산 천제봉이다. 그 뒤로 면봉산 줄기와 보현산 줄기가 겹겹이다. 골짜기의 입구는 넓고 그 끝은 높다. 천의 시작은 높고 그 끝은 넓다. 그 속에 몸 낮춘 사람들의 높은 집들이 있었다.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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