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무열대 모과나무는 장군님 것이 아니외다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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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7   |  발행일 2017-08-17 제31면   |  수정 2017-08-17
[영남타워] 무열대 모과나무는 장군님 것이 아니외다
이창호 사회부장

다시 염치(廉恥)를 생각한다. 예비역 육군 소장 가운데 팔순을 바라보는 최승우(육사 21기)라는 분이 있다. 1990년 무렵 육군 17사단장을 지냈다. 최근 시사잡지 ‘아시아엔’에 실린 이 분의 사단장 시절 얘기가 가슴을 따뜻하게 한다. 당시로선 파격적인 ‘무한(無限) 사병 사랑’. 그는 사병들에게 잔소리 대신 책을 사다 주며 늘 독서하고 사유(思惟)할 것을 권했다. 잡무를 과감히 없애 사병들이 틈틈이 공부를 할 수 있도록 했다. 사회복귀를 준비할 수 있게 한 배려였다. 한 날은 최 사단장 가족이 공관병들과 함께 식사를 하고 있었다. 그때 공교롭게 상관인 군단장으로부터 이른바 ‘회식 콜’이 왔다. 그는 조금의 망설임도 없었다. “오늘 당번병과 먼저 약속을 해 참석할 수 없다”고 거절했다. 선약을 목숨처럼 여겼기 때문이다. 사병을 진실로 가족처럼 여긴 그는 17사단 출신 예비역들 사이에서 오랫동안 칭송받아온 ‘염치를 아는 군인’이었다.

2017년 여름 대구엔 정반대의 군인이 있었다. ‘공관병 갑질’ 파문의 장본인인 박찬주 전 제2작전사령관. 그가 들끓는 국민 여론에 끝내 기름을 붓고 말았다. 군 검찰 수사를 받고 있는 그가 지난 11일 국방부에 인사소청을 제기했기 때문이다. 국방부가 자신의 전역을 연기한 데 대한 항의였다. 조용히 처분을 기다려도 시원찮을 판에, 오히려 화를 낸 꼴이다. 아마 군복을 벗고 민간 검찰의 수사를 받는 게 다소 유리하다(가벼운 처벌)고 판단한 듯하다. 갑질 파문의 발단이 아무리 자기 부인에게 있어도 그 책임은 온전히 박 장군, 당신의 몫임을 모르나. 숱한 선배들이 닦아온 군인의 명예와 정도는 이미 안중에도 없다는 뜻인 게다. 일말의 염치도 없는 군인이다.

“군의 명예를 훼손했다는 자책감을 더 이상 견딜 수 없어…” 지난 1일 박 전 사령관이 밝힌 전역지원서 제출의 변(辯)이다. ‘갑질 폭로’ 하루 만이었다. ‘군인답게 빠르고 깔끔하네’ ‘염치는 있네’ 처음엔 그렇게 생각했다. 그와 일면식이 있고, ‘기갑 출신 첫 4성 장군’이란 이력에 호감을 가져온 터였다. 결과적으로 그를 잘못 본 셈이다. 형국을 보니 전역 지원의 속내가 딴 데 있는 것 같다. 군인권센터의 주장대로 형사처벌과 연금 불이익을 피하기 위한 꼼수로 의심된다. 사회부 취재기자의 얘기로는, 사실 그가 폭로 당일 전역지원서를 제출했으나 반려당했다가 이튿날 다시 낸 것이란다. 이만하면 ‘셈 빠른’ 염치몰수급(級) 군인이다.

그가 일찍 잘못을 깨닫고 개과천선할 수 있는 기회도 있었다. 지난해 부인의 갑질과 관련해 국방부 장관의 경고를 받았을 때다. 염치를 아는 군인이었다면 부인의 작태를 멈추게 했을 것이다. 시늉은 냈다. 부인에게 호통을 치고 한 달 동안 따로 살았다. 그게 다였다. 갑질이 근절될 리 만무했다.

이참에 여단장급 이상 군인의 행실을 규제하는 이른바 ‘장성 규범’이 나와야 한다. 우리 역사상 가장 치밀하고 엄격한 규범으로 통하는 다산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참고해도 좋을 것이다. 목민심서 중 ‘공직자의 정도’처럼, 장성이 되는 순간부터 임지(任地)로 가 임무를 마칠 때까지 가져야 할 올바른 몸과 마음가짐을 낱낱이 제시하면 될 것이다. 그 제일(第一) 규범은 ‘염치’여야 한다.

제2작전사령부가 있는 대구 수성구 만촌동 무열대 안에 모과나무가 많이 있다는 걸 이번에 처음 알았다. 공관병들은 두려움의 존재인 ‘윗분’의 명령에 따라 100개가 넘는 모과를 땄다. 그리고 손이 헐고 짓무를 때까지 썰어서 모과청을 만들었다. 모과나무엔 그렇게 사병들의 아린 눈물이 배어 있다. 조금의 염치라도 있다면 이것부터 깨닫길 바란다. 그 모과나무의 주인은 박 장군 당신이 아니었다는 걸.이창호 사회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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