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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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6   |  발행일 2017-08-16 제29면   |  수정 2017-08-16
[기고] 아들을 군대에 보내며

이제 이놈이 언제 어디에서 무슨 짓을 하는지 걱정할 필요가 없다. 언제나 낮도깨비같이 종적이 묘연하고, 가끔씩 새벽이면 신고해야 할 간첩같이 아리송한 모습으로 나타나 바람처럼 사라지고, 밤낮을 바꿔 생활하니 낮이면 보릿자루처럼 엎어져 자다가 밤이 되면 도화녀의 아들 비형랑(鼻荊郞)처럼 설치고, 헛된 모래성을 쌓아 애비의 심화(心火)를 지피고, 하지 않아도 될 일과 없는 일을 만들어 괜히 바쁜 척하며 들락거리고, 장래계획에 대한 이야기를 나누고자 할 때나 정작 필요할 때는 문틈을 슬슬 빠져 나가던 연기처럼, 아니면 가끔씩 서문시장에 화재를 일으키던 지귀(志鬼)같은 놈을 드디어 옭아서 가두었다.

삼면이 바다고 북으로는 휴전선이 있으니 어디에서 파초선(芭蕉扇)이라도 구하면 모를까 도저히 도망갈 수 없는 화염산의 손오공처럼 꼼짝할 수 없게 가둬버렸다. 공관병이 육군 대장과 별들을 날려버리는 어수선한 시절에, 미국 공격용으로만 사용한다는 핵무기(과연 그럴까)와 사드배치로 시끄러운 이 땅에, 한반도 비핵화선언 이후에 전술핵 재배치가 논의되는 시점에, 나에게는 김정은이나 핵무기보다 더욱 무섭고 홍길동이나 손오공보다 더욱 신출귀몰하던 인간 병기에게 드디어 족쇄를 채우는 데 성공하였다.

그동안 애비의 마음고생이 많았다. 밥은 먹고 다니는지, 사람 행실은 하는지, 친구 사이의 관계는 좋은지, 규칙적인 생활로 건강하게 살아가고 있는지, 과거를 반성하며 장래를 걱정하는지, 심지어는 삶에 대한 의욕이 있는지 없는지, 과음을 하여 밖에서 추한 모습을 보이지는 않는지, 용돈이 없어 고생은 하지 않는지, 집안이나 방을 어지럽히고 정리는 하는지, 친구들과 작당하여 며칠 동안 연락두절이 돼버리는, 이 모든 것을 이제는 전혀 걱정할 이유가 없다.

이제 너는 뛰어봐야 부처님 손바닥 안이다. 이제 네가 무엇을 하는지 알고 있고, 거리는 400㎞정도 된다만 네가 있는 곳을 정확하게 알고 있고, 보고 싶으면 내가 찾아가 만날 수 있으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게 됐다. 밥 걱정, 건강 걱정, 행실 걱정, 규칙적인 생활 걱정, 용돈 걱정, 과음 걱정… 이 모든 걱정도 끝이다. 옷 주고, 재워 주고, 먹여 주고, 운동시켜 주고, 용돈도 주고, 규칙적인 생활은 자동적으로 보장되니 이보다 더 좋을 수는 없다.

네가 들으면 섭섭하겠지만, 너의 불행이 나의 행복임을 이제야 알겠다. 돌이켜보면 우리 관계는 네가 대학에 입학할 때까지는 좋았다. 하지만 입대를 위해 아무런 의논 없이 덜컥 휴학하고 몇 달 동안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뛰어다니거나 건달처럼 빈둥거리면서 우리 관계는 어긋나기 시작했다. 입대를 앞둔 너의 심정을 헤아리지 못한 것은 아니었지만 코뚜레 없이 날뛴 너의 대책 없음이 이런 결과를 초래했다. 우리 집 아이가 아니라 동네 아이로 불린 지난 몇 달간의 세월을 끝으로, 너는 마침내 동네 아이에서 조국을 지키는 나라의 아이가 되었으니, 다시 우리 집 아이로 돌아올 때쯤이면 너의 행복이 나의 행복이 되고 너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될 것이다. 그래서 애비는 이제부터는 걱정하지 않기로 한다.

이제 너는 분명히 알게 될 것이다. 군대에 가면 인내를 배워 인간이 된다고 하는 그 인내가 사실은 얼마나 비굴해져야 비로소 인간의 탈을 쓸 수 있는지, 너의 적은 어디에 있고 어디로 찾아오는지, 햇볕이 어느 창문으로 들어오고, 어둠은 또 어디에서 비롯되는지, 사소하고 일상적인 것들이 얼마나 큰 기쁨이고 소중했는지, 짧은 순간과 작은 것들이 얼마나 큰 축복이었는지, 일기일회(一期一會)의 진정한 의미가 무엇인지, 행복과 불행이 어느 문으로 들어왔다가 나가는지, 희망과 절망이 어디쯤에서 이어지고 끊기는지, 물과 피가 어찌 다른지, 사격훈련이나 유격훈련 전에 흘리는 땀이 왜 중요한지, 눈 오는 겨울이 되면 밤새워 작전도로를 뚫기 위해 왜 인간 제설기가 되어야 하는지, 절도 있는 동작과 예측가능한 행동이 무엇인지, 중요한 순간에 정신집중과 패기의 부릅뜬 눈이 어째서 필요한지, 난로 위의 물주전자가 왜 끓으며, 끓는 물이 어찌하여 아슬아슬하게 넘치지 않는지, 왜 그것을 사랑의 변주곡이라 부르는지, 그 모든 것을 온 몸으로 깨닫게 될 것이다. 김영현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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