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정래 칼럼] 소년이 온다

  • 조정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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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11   |  발행일 2017-08-11 제23면   |  수정 2017-08-11
[조정래 칼럼] 소년이 온다

“목숨이 쇠심줄 같어서 너를 잃고도 밥이 먹어졌제. 정대네 아부지까지 떠나 괴괴한 문간채는 자물쇠로 채워버리고, 꾸역꾸역 가게에 나가 장사를 했제. …그저 겨울이 지나간게 봄이 오드마는. 봄이 오면 늘 그랬드키 나는 다시 미치고, 여름이먼 지쳐서 시름시름 앓다가 가을에는 겨우 숨을 쉬었다이.”(‘꽃 핀 쪽으로’) 신군부의 총부리에 막내아들(소년)을 잃은 광주 어머니의 삶은 살아도 산 게 아니었다. 한강은 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막내를 비명에 보내고도 보내지 못한 어머니의 단장(斷腸)의 넋두리를 독백조 긴 사설로 풀어놓으며 ‘광주 5·18’을 새로이 호명하고 살아남은 자들의 여전히 아물지 않은 상처를 극적으로 재구성한다.

‘80년 5월 광주’는 작가도 독자도 쉬 대면하고 싶지 않은 불편하고 진부하기까지 한 소재라는 점에서 ‘소년이 온다’는 그동안 나온 많은 기록과 저작들의 더미에 또 다른 하나를 다시 보태는 다큐멘터리로 읽힐 위험성을 애초에 안고 있었다. 하지만 그런 우려를 불식하고 한강의 소설이 다큐멘터리와 픽션의 경계를 넘나들며 사실(史實) 이면의 현장감과 사실감을 주는 건 순전히 작가의 인간학적 능력에 기인하는 것인가.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제 더 절실한 것은 역사적 사실에 근거한 응징과 복권의 서사이기보다는 상처의 구조에 대한 투시와 천착의 서사”라고 규정하며, ‘소년이 온다’가 문학에서 ‘5·18’이 어떻게 다뤄지고 심화돼야 하는지 잘 보여준다고 논평했다.

문학적 평가를 운운할 능력이 부족한 나는 개인적으로 한강이 어린 시절 어른들로부터 들었던 광주 소년들의 참상을 재현해내야 하겠다는 부채감과 소명(召命)을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뒤까지 잊지 않고 다시 끄집어내고 그것에 기어이 응답한 열정에 더 후한 점수를 주고 싶다. 2016년 그에게 맨부커 인터내셔널 상을 받게 해준 소설 ‘채식주의자’보다 ‘소년이 온다’가 더 인상적이라는 입소문도 책을 정독하게 한 계기가 됐다. 기실 지금까지 ‘광주 5·18’은 건조한 사실(事實)들의 조합이자 파편적인 사건들의 합이었는데, ‘소년이 온다’는 80년 광주와 ‘지금, 여기’의 우리를 다시 비춰보게 한다.

이제 그만 하고, 그만 잊자고 한다. 세월호 사건은 우연히 일어난 교통사고나 다름없는 사고이기에, 특정인들에게 책임을 물을 수 없고 비특정인들과는 더욱 무관하니 덮고 가자고 한다. 진실 규명을 촉구하는 세월호 유가족들의 시위와 단식을 ‘시체장사’ 등으로 폄훼하는 가벼운 입들은 제 소리를 거세당한 앵무새들의 지령들이다. 우리가 무의식적으로 되뇌는 언어는 지배계층에 의해 구조적으로 조작된 폭력이고, 권력자들에 의해 정교하게 왜곡·성형된 위악·위선적 족쇄다. 서쪽의 광주와 동쪽의 대구, 그 사이의 거리는 여전히 멀다.

바로 이 지점에서 ‘소년이 온다’는 생생한 증언과 생경한 목소리로 망실해져 가는 5·18을 다시금 환기한다. 소설을 재독(再讀)하면서, 광주에 포획될 수밖에 없었던 작가의 유년의 기억을 발견하고, 페이지를 넘기며 때로는 분노하고 또 때로는 최루(催淚)에 몸을 맡기면서 세심(洗心)을 경험한다. ‘독서는 삼독(三讀)이다. 먼저 텍스트를 읽고 다음으로 그 텍스트의 필자를 읽고 마지막으로 독자인 자기자신을 읽는다.’ 현독(賢讀)을 위한 고 신영복 교수의 독파(讀破)에 전적으로 공감하고, 그 독서법에 따라 처음으로 ‘소년이 온다’를 두 번 읽으며, 잠 못 드는 열대야에 책 읽는 즐거움을 느끼게 해 준 선생의 가르침에 감사드린다. 역사적 사실(事實)들을 둘러싼 기억투쟁이 아니라 인간성 회복 투쟁에 나서야 한다고, ‘소년이 온다’는 우리의 등을 떠민다.

‘소년이 온다’와 함께 ‘광주’와 ‘5·18’이 다시 우리에게로 온다. 최근 문재인 대통령은 5·18 정신을 헌법 전문에 담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광주를 새롭게 조명하려는 일각의 시도와 맞물리면서 그것의 타당성에 대해서는 깊은 탐색과 성찰이 필요하고, 또 그 주제 하나만으로 사회적 논란을 불러일으키고도 남을 터. 5·18 정신의 헌법 전문 반영이 과연 합당한지는 차치하고, 어쨌든 ‘소년이 온다’는 80년 광주를 새로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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