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타워] 아픈 역사는 무조건 지우는 것이 능사일까

  • 백승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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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8-03   |  발행일 2017-08-03 제31면   |  수정 2017-08-03
[영남타워] 아픈 역사는 무조건 지우는 것이 능사일까
백승운 사회부 특임기자 겸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팀장

22년전의 일이다. 1995년 8월, ‘역사 바로세우기’를 내세운 김영삼정부는 일제의 상징이던 조선총독부 건물을 철거했다. 당시 철거를 놓고 의견은 분분했다. ‘민족의 비극적인 역사인 만큼 없애야 한다’는 주장과 ‘치욕적인 역사를 잊지 말자는 뜻에서 보존해야 한다’는 의견이 팽팽했다. 하지만 당시 김영삼 대통령은 철거를 강행했다.

철거 방식도 드라마틱했다. 부분 철거가 시작되자 일본 정부는 ‘우리가 지은 건물이니 통째로 이전하겠다. 모든 비용은 우리가 부담하겠다’고 공식성명을 발표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김 대통령은 바로 다음날 총독부 건물을 폭파해버렸다. 특히 건물의 대회의실을 폭파하는 장면을 생중계하기도 했다. 보존 의견이 팽팽히 맞선 가운데 총독부 건물을 폭파·철거한 이유는 명쾌했다. ‘치욕의 역사를 지우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는 김 대통령의 ‘결의’ 때문이었다.

일제강점기 역사를 두고 대구에서도 비슷한 일이 벌어지고 있다. 대구 중구청이 70억원의 사업비를 들여 조성한 순종어가길 사업이 그것이다. 순종어가길은 1909년 1월7일, 순종임금이 남쪽지역 순행에 나섰던 역사를 바탕으로 조성한 길이다. 순행은 민심안정이 명분이었지만, 반일 감정을 잠재우려는 일제의 속셈이 숨어있었다. 당시 조선은 한일신협약과 군대해산으로 반일 감정이 극에 달해 있었다. 순종의 순행은 일제의 철저한 계산속에 진행된 하나의 정치적 이벤트나 다름 없었다.

순종의 순행은 대구와 부산, 마산을 거쳐 서울로 돌아가는 일정이었다. 첫 행선지가 바로 대구였다. 대구역에 도착한 순종은 북성로를 지나 경상감영에서 하루를 묵었다. 다른 지역 일정을 마친 뒤 순종은 12일 다시 대구를 찾았다. 이날 순종은 대구역에서 내려 가마를 타고 북성로와 수창동을 거쳐 달성공원에 방문했다. 이 길을 임금이 가마를 타고 지나갔다고 해서 ‘순종어가길’이라고 부른다. 대구 중구청은 당시의 역사를 바탕으로 북성로와 수창동 일대 2.1㎞를 ‘순종 어가길’로 조성했다. 역사거리를 조성하고 순종 동상도 세웠다.

이러한 가운데 민족문제연구소 대구지부가 순종어가길 사업을 ‘반민족·친일역사 선양사업’이라고 주장하고 나섰다. 연구소 측은 “일제에 대한 우호적 분위기를 조성하고 식민지 지배를 앞당기기 위해 순종을 꼭두각시로 내세운 행차였다”고 설명한다. 그러면서 “지금이라도 순종어가길 사업을 전면 백지화하라”고 요구하고 있다.

총독부 건물과 순종어가길은 비극적이고 굴욕적인 역사다. 식민통치의 상징적인 건물이었고, 일제의 정치적 이벤트에 임금까지 동원된 뼈아픈 역사가 아닐 수 없다. 그런 치욕스러운 현장을 보존하고 기념하는 것에 대해, 따지고 부당하다고 주장하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다.

하지만 치욕의 역사라고 해서 부수고 지우는 것만이 능사일까. 총독부 건물은 비록 점령자의 식민 건물이지만 나름의 가치가 있는 유산이었다. 순종어가길 역시 굴욕의 현장이지만 결코 잊어서는 안될 우리의 역사다. 역사는 부수고 지운다고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더욱이 치욕의 역사는 묻으려 몸부림칠수록 선연하게 솟아나기 마련이다. 우리가 그렇게 분노하는 ‘아베 정권’의 행태도 다를 바 없다. 사실을 감추고 심지어 왜곡도 서슴지 않지만, 그럴수록 그들의 만행은 생생하게 살아나고 있다.

아픈 역사는 반면교사 삼을 일이지, 억지로 부수고 지운다고 해결되는 것이 아니다. 후대에 자랑스러운 역사만을 기억시키려는 시도 또한 온당치 못하다. 비극으로 얼룩진 역사라도 그것을 뿌리째 부정해서는 안된다. 그 실체를 보존하고 기억해서 미래 비전을 제시하는 매개체로 삼아야 한다. 지우고 묻어둔다고 해서 국가의 자존심이 살고, 보존하고 기억한다고 해서 국가의 위상이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생각하는 것 자체가 ‘또 다른 비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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