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20·<끝>] 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마오- 사마상여와 탁문군(下)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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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7   |  발행일 2017-07-27 제22면   |  수정 2017-07-27
다음 생애 당신이 여자로…‘怨郞詩’ 써 사마상여 마음 돌린 탁문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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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쓰촨성 청두 시내 금대로의 시비(詩碑) 거리에 세워진 사마상여의 ‘봉구황(鳳求凰)’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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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문군 초상화.

이 소식이 탁왕손에게 전해지자 그는 화가 나 노발대발했다. 그러나 야반도주한 것에 대한 배신감으로 딸에게는 돈을 한 푼도 주지 않기로 한 것도 있고 해서,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면서 속으로 끙끙 앓기만 했다.

그러던 중 하루는 친한 벗이 찾아와 그에게 충고를 했다.

“자네가 딸에게 돈을 주지 않아서 딸이 주막을 하고 있는데, 그건 자네의 체면도 잃게 하는 게 아닌가. 사정이 어떠하든 자네 딸임은 부인할 수 없으니 딸에게 돈을 주어 좀 걱정 없이 살 수 있도록 해주게나. 그러면 모든 문제가 해결될 것 아닌가?”

이 말을 들은 탁왕손은 못 이기는 척하며 딸에게 많은 돈과 노비(100명), 옷, 이불, 패물 등을 주어 주점을 거두게 하였다. 둘은 탁왕손의 도움으로 청두에 집과 논밭을 장만하고 노비까지 부리며 살게 되었다. 탁왕손은 그래도 딸과 사위의 왕래를 허락하지는 않았다.

◆백발이 되도록 헤어지지 말아야 하는데

후에 한무제가 즉위한 뒤, 어느 날 우연히 사마상여가 지은 ‘자허부(子虛賦)’를 읽게 되었다. 한무제는 그 글을 읽어보고는 감탄하며 “누가 지었는지 글 솜씨가 가히 선인의 경지에 이르렀구나. 짐이 이 사람과 같은 시대에 살지 못하다니 참으로 통탄스럽구나(朕獨不得與此人同時哉)”라고 탄식했다.

그러자 양득의(楊得意)라는 사람이 옆에 있다가 그 글을 쓴 사람이 자신과 같은 고향 사람이라며 잘 안다고 말했다. 한무제는 반가워하며 사마상여를 불러들여 만나보았다. 사마상여는 부를 지어 바쳤고, 한무제는 그 재능을 높이 사서 그를 중랑장(中郞將)에 임명하며 중용했다. 이후 사마상여는 한무제의 사랑을 받으면서 벼슬도 점점 높아졌다.

사마상여는 모든 일이 잘 풀려가고 배가 불러지자 탁문군에 대한 사랑도 식어, 첩을 새로 들이려고 했다. 무릉(茂陵)의 여자를 첩으로 맞으려 한 것이다. 이 사실을 알게 된 탁문군은 사마상여를 원망하면서 ‘백두음(白頭吟)’이라는 시 한 편을 지어 상여에게 주면서 헤어지자고 했다.

‘당신에 대한 저의 애정은 희기는 산 위의 눈과 같고(如山上雪)/ 밝기는 구름 사이의 달과 같았지요(皎若雲間月)/ 듣자니 그대 두 맘이 있다 하여(聞君有兩意)/ 일부러 와서 이별을 고하려 하네요(故來相訣絶)/ 오늘은 말술을 함께 마시겠지만(今日斗酒會)/ 내일 아침엔 도랑 물가에 서 있겠지요(明旦溝水頭)/ 도랑 위에서 헤어져(御溝上)/ 물길 따라 동과 서로 걸어가겠지요(溝水東西流)/ 처량하고 또 처량하겠군요(凄凄復凄凄)/ 여자가 결혼하면 울지 않아야 하는데(嫁娶不須啼)/ 나만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願得一心人)/ 백발이 되도록 헤어지지 말고 살고 싶었건만(白頭不相離)/ 대나무 낚싯대는 어찌 이다지도 하늘하늘하고(竹竿何)/ 물고기 꼬리는 어찌 이토록 날렵할까요(魚尾何)/ 남자는 의기를 중히 여기는데(男兒重意氣)/ 어째서 돈만 위하나요(何用錢刀爲)’

한무제 총애 받게 된 사마상여
중랑장 중용 후 벼슬 높아지자
기생집 드나들고 첩 들이려 해

이별 고하는 탁문군의 詩 받고
자신의 헛된 욕심 깊이 깨달아
부부 사랑 되찾고 화목한 여생


탁문군은 이 시 앞에 다음과 같은 글을 써 곁들였다.

‘봄날의 백화는 만개하여 그 아름다움을 다투고(春華競芳)/ 현란하고 흰 색조는 순결한 얼굴을 가린다(五色素)/ 거문고에서는 여전히 옛 노래 소리 울리는데(琴尙在御)/ 옛사람은 이미 모두 떠나고 새사람이 대신했네(而新聲代故)/ 비단 물결 금강에 노니는 원앙 한 쌍(錦水有鴛)/ 한나라 궁궐에 우뚝 서 있는 나무 한 그루(漢宮有木)/ 모두들 한결같이 언제나 새로운 모습인데(彼物而新)/ 아, 세상 사람들이여!(嗟世之人兮)/ 미색에 미혹되어 새로운 것만 찾고 옛 것을 버리는구나!(於淫而不悟)/ 거문고 줄 끊어지고(朱弦斷)/ 맑은 거울은 흠집이 났네(明鏡缺)/ 아침 이슬이 마르고(朝露晞)/ 여인의 향기 사라지니 사람은 떠나가네(芳時歇)/ 이에 백두의 노래를 불러(白頭吟)/ 이별을 슬퍼하노라!(傷離別)/ 바라건대 맛있는 음식을 드실 때 저를 괘념치 마시오(努力加餐勿念妾)/ 저 호호탕탕한 금강에 대고 맹세하건대(錦水湯湯)/ 이후로는 당신과 영원히 만나지 않으리라!(與君長訣)’

자신을 위해 수만금의 재산도 거들떠 보지 않았던 탁문군의 지극한 사랑을 잊어버리고 헛된 욕심을 냈음을 깊이 깨달았을 것이다. 사마상여는 탁문군이 전한 이 ‘백두음’을 읽은 후 첩에 대한 망상을 버리게 되고, 두 사람은 사랑을 되찾아 화목하게 잘 살았다. 기원전 117년 사마상여는 사망하고, 탁문군은 홀로 늙어갔다.

지금 중국의 쓰촨성 공협현 성내에는 문군공원(文君公園)이 있고, 경내에 문군정(文君井)이란 우물이 있다. 이 문군정이 당시 사마상여와 탁문군이 주점을 차렸을 때 사용하던 우물이라고 전한다.

사마상여와 탁문군 이야기는 대부분의 중국인들이 알고 있는 러브스토리로, 지금까지도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고 있다. 그런데 2007년 왕리췬(王立群)이라는 대학교수가 이 러브스토리가 거짓이라고 주장했다. 사마상여가 탁문군에게 사랑이 아닌 돈 때문에 접근했다고 주장한 것이다. 이러한 주장으로 중국의 인터넷은 뜨겁게 달구어졌고, 왕리췬 타도운동이 벌어지기도 했다.

◆탁문군(卓文君)은

쓰촨성 린충(臨) 사람으로 본명은 문후(文后)이다. 서한(西漢) 시기의 재녀(才女)로, 미모도 뛰어나고 거문고와 문장에 능했다.

남편 사마상여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도 전한다.

사마상여가 벼슬을 하고 형편이 좋아진 후 기생집에 드나들고 첩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면서 탁문군을 버리려고 했다. 사마상여는 아내한테 ‘일이삼사오륙칠팔구십백천만’이란 13자의 편지를 보냈다. 탁문군은 숫자 중에서 유독 ‘억’이 빠진 걸 보고 억자가 없는 ‘무억(無億)’은 ‘무억(無憶)’을 암시한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탁문군은 눈물을 흘리면서 ‘원랑시(怨郞詩)’를 써보냈다. 그 시를 받아본 사마상여는 탁문군의 재주에 깜짝 놀라면서 자신의 행실을 부끄럽게 생각했다. 그 후부터 사마상여는 다시는 첩을 맞아들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남편을 원망하는 시인 ‘원랑시’는 남편을 원망하는 마음 등을 길게 표현한 뒤 ‘아! 낭군이시여, 다음 생애에는 당신이 여자가 되고 내가 남자가 되기를’이라고 끝을 맺고 있다.

탁문군은 채문희(蔡文姬), 이청조(李淸照), 상관소용(上官昭容)과 더불어 중국 ‘고대사대재녀(古代四大才女)’로 불리어 왔다. 또 설도(薛濤), 화예부인(花夫人), 황아(黃娥)와 더불어 ‘촉중사대재녀(蜀中四大才女)’로 일컬어지기도 한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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