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텔링 2017] 청송의 혼, 樓亭<6> 골짜기의 밖에서 - 갈전당과 영모정 그리고 삼은정, 운암정

  • 박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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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6   |  발행일 2017-07-26 제13면   |  수정 2021-06-21 17:05
주산천 좁은 물길에서 葛田公은 ‘배꽃의 바다’를 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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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동면 이전리에 자리한 영모정의 모습. 주산천 이전교 인근에 위치한 영모정은 안동임씨 청송 입향조 갈전공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정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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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까이에서 본 영모정. 갈전공의 후손들은 ‘정자에 올라 밭과 구름을 바라보고 창을 열고 달을 맞이하여 옛날 오르내리시던 자취를 찾아 우러러 본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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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은정은 청송군 부동면 상의리 양지교 인근의 한 펜션 건물 뒤편에 자리하고 있다. 펜션의 마당을 가로질러야 정자에 닿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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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송군 부동면 하의리에 위치한 운암정. 운암정은 파평윤씨 운암 윤공의 후손이 공의 묘소 근처에 세우고 조석으로 문안했던 정자다.

 

주왕산. 저 산에 하 많은 골짜기들이 있다. 꿈과 같은 설렘이 밀려오는 골짜기들. 그러나 한없이 평온하면서도 청동처럼 두렵고, 위안으로 넘치지만 동경 때문에 도달하기 어려운, 은하수와 같은 골짜기들이다. 그래서 옛 사람들은 그 골짜기가 아닌 그 골짜기 입구에 집을 지었을지도 모른다.

#1. 이해의 주인을 영모하다, 갈전당과 영모정

주왕산의 남쪽 자락에 절골과 주산골이 있다. 두 골짜기는 스윽 산세를 타고 만나 주산천으로 하나 된다. 생각만으로도 숨 못 쉴 듯 황홀한 두 골짜기가 합심해 주산천을 세상으로 내보냈다. 청송군 부동면 이전리의 이전네거리는 절골과 주산골을 떠나온 주산천이 문득 한번 뒤돌아보는 듯한 장소다. 집 나선 아이가 이윽고 한번 뒤돌아보는 자리, 멀리 대문 앞에서 여전히 손을 흔드는 실루엣을 바라보는 자리, 동구와 같은 자리. 이전네거리는 그런 장소다.


임란 때 청송 입향한 안동임씨 갈전공
척박한 땅에 배나무 심었다고 전해와
주산천 자락에 그를 기리는 두 정자

주왕골 주방천변 벼랑 위의 삼은정
山水에 숨었으나 가슴활짝 편 모습

운암 후손이 하의리에 세운 운암정
구름을 벗하여 바위에 눕는다는 뜻
선계와 속세의 경계에 놓여있는 듯



그런 곳에 우뚝 멈춰 선 두 채의 정자가 있다. 갈전당(葛田堂)과 영모정(永慕亭)이다. 갈전당은 안동임씨 청송 입향조 갈전공의 재실이다. 한 칸 넓은 부엌과 두 칸의 온돌방을 가진 건물로 단순하고 정갈한 매무새다. 상량에 2003년 먹색이 또렷하니 그리 오래지 않은 집이다. 영모정은 갈전당보다 훨씬 이전에 세워진 것으로 갈전공을 추모해 지은 정자다. 정면 세칸 둥근 기둥마다 주련을 걸고 팔작지붕을 균형 있게 얹은 모습이다. 좀 더 골짜기 가까이, 좀 더 둔덕진 터에, 따로 담장을 두르고 작은 문을 세워 보다 높은 위계를 드러내고 있다.

갈전당 앞 길가에 두 단 석축을 높여 세운 ‘가선대부 갈전 임공 유허비’가 있다. 비의 뒷면에 빼곡히 새겨진 글이 갈전공에 대해 이야기해 준다. 공의 이름은 동추(同樞), 휘는 동(東), 자는 덕망(悳望)으로 갈전(葛田)은 호다. 공은 임진란 때 함안조씨 사정공(寺正公) 조수도(趙守道)와 갈전(葛田)으로 피란했다 한다. 갈전은 산노루떼 넘나들던 왕거암 중턱으로 여겨진다. 공은 그곳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배나무를 심었다고 전하는데 이것이 이전리(梨田里)의 연원이다. 임란 후 갈전공은 배밭의 응달진 갈대밭(梨海陰地蘆田)으로 선산(先山)을 옮기고 그 묘 아래에 영영 머물렀다. 그 유허에 자손들이 세운 것이 영모정이다.

비문의 마지막 구절이 인상 깊다. ‘청송백학(靑松白鶴) 이 고장에 팔경(八景)을 갖추어라. 그 주인은 갈전옹 유행(儒行)이 높았다오. 늙은 나무 푸새 잎에 끼친 향내 남아 있고 후손이 세거하여 칡처럼 뻗었으니 이곳에 빗돌 세워 천추(千秋)에 전하리라.’ 임공의 호 갈전의 뜻은 처음 칡밭을 일구던 때로부터 천추에까지 닿아 있다. 그런데 저 팔경은 또 무엇인가. 그 해답은 주산천을 바라보는 영모정 대청에 걸려 있다.

‘이해(梨海)팔경’이라 한다. 배꽃의 바다에 펼쳐져 있는 여덟 경치다. 1경은 운수동의 봄꽃(雲水春花)으로 운수동은 절골의 옛 이름이다. 2경은 황암의 가을풍경(皇岩秋葉), 3경은 용담의 맑은 폭포(龍潭淸瀑), 4경은 마암의 낙조(馬岩落照), 5경은 무포산의 달(霧抱山月), 6경은 옥녀봉의 구름(玉女峯雲), 7경은 밤나무 밭의 아침 볕(栗田朝陽), 8경은 산봉에 저무는 노을(蒜峯晩霞)이다. 후손들은 ‘정자에 올라 밭과 구름을 바라보고 창을 열고 달을 맞이하여 옛날 오르내리시던 자취를 찾아 우러러 본다’고 했다. 휘 돌아보면 갈전옹의 이해는 은하수와 같고, 여전히 우러러보는 저기에 있다.

#2. 삼의에 숨다, 삼은정

주왕산 주왕골, 그 떨리는 계곡에서부터 주방천은 심장의 박동처럼 쏟아져 흐른다. 주왕산의 길목에는 펜션과 식당들이 즐비해서, 그 너머에 주방천이 흐르고 있다는 것을 미처 알지 못한다. 그래서 여러 가겟집들을 유심히 살펴야 마침내 정자를 찾아낼 수 있고, 통나무집 펜션의 마당을 가로질러야 정자에 닿을 수 있다. 정자는 주방천변의 벼랑 위에서 천을 향해 앉아 있다. 마당과 정자는 콘크리트 담장으로 분리되어 있다. 담장은 순박한 정성으로 키운 온갖 야생화들로 장식되어 있는데, 그 가운데 열려있는 녹슨 철문 속으로 정자의 뒷모습이 보인다. 삼은정(三隱亭)이다.

주왕골은 상의리에 속한다. 옛 이름은 삼의리(三宜里). 삼위리(三危里)가 음변한 것으로 주왕산 주왕전설 속 마장군이 세 번의 위기를 겪었다는 데에서 나온 이름이라 한다. 삼의가 상삼의와 하삼의로 나뉘었고 다시 ‘삼’이 탈락한 것이 지금의 상의, 하의다. 옛날 이곳에 살던 한 사람은 스스로 호를 삼은(三隱)이라 했는데 대저 ‘삼의에 숨어 산다’는 뜻이다.

삼은공은 성품의 됨됨이가 높고 질박하고 행동은 빛이 나서 세속에 따르지 않았다 한다. 위엄 있고 깨끗했다고 기억되는 분이다. 그가 세상을 떠난 뒤 그의 아들이 지은 것이 삼은정이다. 아들은 땅을 팔고 재목을 구해 삼은공이 오르내리며 그 천석의 아름다움을 사랑했던 땅에 정자를 지었다. 아래에 소가 둘러 있고 하늘이 아끼고 땅이 감추어 온 곳이었다.

삼은정은 많이 퇴락했다. 마루는 부서질 듯하고 두껍게 쌓인 기왓장들은 아우성처럼 흩어질 듯하다. 문득 무엇인가가 날갯짓한다. 저 위태로이 곧추선 망새기와 속에서 봉황인지, 삼족오인지 혹은 태극인지 모를 형상이 파득인다. 무엇이었든, 정자를 세운 이는 거기에 영원에의 기원을 담았을 것이다. 삶의 숨결은 사라지고 의미에 찬 형상은 사라져 가고 있다.

주방천을 가로지르는 양지교 가운데서 바라보면 멀리 천변의 벼랑 위에 선 삼은정의 옆모습이 보인다. 주왕산 자락의 병풍 같은 바위를 바라보고 있는 정자는 산수정원 속 하나의 아름다운 경물로 보인다. 산과 하늘을 향해 가슴을 활짝 펴고 있는 후련한 모습이다. 상상해보면, 스스로 숨었으나 눈은 맑고 넓고 깊었으리라. 녹슨 철문 속 삼은정의 뒷모습을 되돌아본다. 가난하면서도 다정하다.

#3. 구름을 벗하여 바위에 눕는다, 운암정

상의리 아래 하의리에는 동네의 가운데자리 우뚝 높은 석축 위에 운암정(雲亭)이 앉아 있다. 정자에 대한 기록은 주왕산에 대한 찬으로 시작된다. ‘맑은 기운이 가득히 서려 뾰족하게 우뚝 솟아 바다에까지 닿은 산이 세상에서 소금강이라 말하는 주왕산이다.’ 그러고 나서 마을과 정자에 대한 이야기를 펼친다. ‘신령스러운 선경이 펼쳐져 있어서 반드시 절만 아름다운 것이 아니고 꿈틀꿈틀 한 가지의 산이 삼의골에 이르러 한 구역의 동리가 열렸는데 수풀이 으슥한 언덕에 운암정이 서있다.’

대는 처음부터 높았던 모양이나 으슥한 수풀은 없다. 운암정은 환한 마을과 동구의 마을숲을 근경으로 가지고, 마을 앞들과 먼 산을 원경으로 마주하고 있다. 이처럼 평온하고 소박한 풍경은 지금 청송 땅에 흔하지만 운암정기가 전하는 마을의 옛 모습에는 주왕산 골짜기의 마을이라는 자부심이 담겨 있다. 그러나 운암정 현판은 굳은 얼굴로 턱을 치켜들고 하늘을 바라본다.

운암정은 파평윤씨 운암 윤공의 후손이 공의 묘소 근처에 세우고 조석으로 문안했던 정자다.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 겹처마에 팔작지붕 건물로 가운데 대청방이 있고 전면이 마루다. 대청의 양쪽은 온돌방인데 여닫을 수 있는 광창이 설치되어 있다. 얇고 여린 문종이는 모두 해어졌으나 문살 하나하나, 기둥 하나하나, 모두 곧고 탄탄하다. 공들여 장식한 익공에서 정자 지은 이의 마음이 엿보인다.

운암 윤공은 어릴 때부터 효가 높고 비범해 주위 사람들이 듣고 놀랄 말들을 종종 하셨다 한다. 향시에 합격했으나 성시에 낙방했는데 포부를 펴지 못하고 돌아와서는 가슴 후련히 세상의 문을 닫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큰 스승들의 자취를 찾아 향배하고 떠돌며 세상을 개탄하고 깊이 근심했다고 한다.

운암은 공이 스스로 지은 호로 구름을 벗하여 바위에 눕는다는 뜻이다. 바위에 누워 구름을 바라보면, 구름 위에 누운 것 같다. 구름 위에서 바위에 누운 자신을 보는 것 같다. 신선이 된 것 같다. 그러나 한편 큰 강의 편엽처럼 울렁거리고, 흔들리며 힘준 손끝은 차갑고 단단한 바위에 닿는다. 운암공은 그렇게 선계와 속세의 경계에 계셨던 게 아닐까. 운암정은 그렇게 있다. 선계와 속세의 경계에, 골짜기의 밖에.

글=류혜숙<여행칼럼니스트·영남일보 부설 한국스토리텔링연구원>
사진=박관영기자 zone5@yeongnam.com
공동기획:청송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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