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5. ‘위장결혼’ 김왕자씨 “별천지 상상하고 온 미국 ‘절망’…지금은 부동산업으로 안정”

  • 최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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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6   |  발행일 2017-07-26 제6면   |  수정 2022-05-18 17: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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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왕자씨는 자신을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라고 설명했다. 위장결혼으로 미국에 입국할 때 “하늘에서 돈이라도 떨어지는 줄 알았다”고 했다. 왼쪽 상단은 김왕자씨의 위장결혼식 때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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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王’. 김왕자씨(74)의 도미(渡美) 계기가 된 한 글자다. 이발소에서 만난 화교 남성 왕모씨는 왕자씨의 이름에 자신의 성씨 ‘왕(王)’자가 들어가는 것을 운명이라 믿었다. 미국으로 떠난 뒤에도 왕자씨를 잊지 못해 그를 데려가기로 마음 먹었다. 하지만 이미 가정이 있던 왕씨는 대안으로 위장결혼을 제안했다. 왕자씨는 왕씨가 돈 주고 포섭한 중국계 미국인과 결혼하는 것처럼 꾸며 미국 비자를 발급받았다. 미국행 점보여객기에 오르기 전, 왕자씨의 머릿속은 환상의 나라 미국으로 가득 차 있었다.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 5화는 위장결혼으로 미국에 건너간 어느 대구·경북 여성의 이야기다.

渡美 9개월만에 동거남과 이혼
고달픈 현실에 자살까지 생각
 어느날 일이라도 해보자 결심
식당 전전 하루벌어 하루살아
 한의원에서 근무할땐
영어 한마디도 몰라 눈치로 버텨


◆‘왕(王)’자로 맺어진 운명

김왕자(金王子). 아들에게나 지어줄 법한 이름 탓에 집에서는 왕(王)자에 점 하나만 찍어 옥(玉)자나 옥희라고 불렀다. 대구 안심면에서 태어난 아버지는 총각 시절 일자리를 구하러 일본으로 떠났다. 어머니는 아버지를 따라 일본에서 살림을 차렸다. 왕자씨는 그곳에서 태어났다. 10남매 중 셋째, 자매 중 맏이였다.

왕자씨가 4세 되던 해 가족들은 한국으로 왔다. 유년시절 아버지는 왕자씨를 자주 때렸다. 16세의 왕자씨는 아버지를 피해 빨간 치마와 하얀 적삼을 입고 서울로 도망쳤다. 당시 친오빠와 수양오빠가 서울에 살았다. 생활비를 벌기 위해 남의 집에서 아기 돌보는 일을 했다. 일하러 간 곳 중에는 김응용 전 프로야구감독의 집도 끼어 있었다.

“나는 18세, 김 전 감독은 20대 초반이었어. 야구가 뭔지도 몰랐는데 그 집에만 가면 그 양반이 작은 방 안에서 뭘 휘휘 내두르더라고. 나중에 신문을 보니까 그 사람이 야구선수였던 거야.”

가사도우미로 이집 저집 떠돌던 왕자씨는 이발사였던 수양오빠를 따라 이발소에서 면도사로 일했다. 그곳에서 첫 번째 남편 탁모씨를 만났다. 짧은 인연이었다. 결혼한 지 4년, 왕자씨 나이 23세에 탁씨는 사망했다.

이후 화교 출신의 왕모씨를 만났다. 그는 왕자씨의 이름에 자신의 성씨 ‘왕(王)’자가 들어간다는 점을 알고 난 후 운명이라고 말했다. 이미 가정도 있었고 가족들과 미국으로 이민간 후였지만 왕자씨를 잊지 못했다. 그래서 제안한 게 위장결혼. “자기 성씨랑 내 이름 ‘왕’자가 똑같으니까 운명이라고 믿었나봐. 목숨 걸고 나를 미국에 데려가겠다 하더라고.”

◆위장결혼으로 미국에 입성하다

위장결혼. 겁은 났지만 피하고 싶지는 않았다. 미국행은 왕자씨도 내심 바라던 바였다. 왕씨는 적극적으로 왕자씨의 미국 위장결혼을 주도했다. 계약 결혼할 중국계 미국 남성을 구해 1974년 6월 한국으로 보냈다. 왕자씨가 위장결혼할 상대 신모씨였다. 친지들이 참석한 가운데 허위로 결혼식을 치르고 웨딩사진을 찍었다. 신씨와 나이차가 22세나 난 탓에 이민 수속을 밟는 중에도 여러 번 의심을 받았다. 우여곡절을 겪으며 위장결혼 1년 뒤 비자를 받아 미국으로 떠났다. “왕씨가 돈 주고 신씨랑 계약한 거지. 70년대 중반엔 위장결혼이 흔했거든. 신문을 보면 미국에 가려고 계약 결혼하다가 적발됐다는 기사도 많이 나왔어.”

미국의 현실은 상상 속 별천지와 너무 달랐다. 믿었던 왕씨의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었다. “왕씨가 돈을 많이 버는 줄 알았어. 그런데 와서 보니까 호텔 도어맨인 거야. 자기 입에도 풀칠하기 바쁜데 어떻게 날 도와주겠어.”

신씨와의 동거도 여간 까다로운 게 아니었다. 예민했던 신씨는 왕자씨가 조금만 소음을 내도 성질을 부렸다. 언어가 안 통해 외출도 불가능했다. 그렇게 7개월. 집에서만 세월을 보냈다.

“내가 할 수 있는 게 아무것도 없잖아. 직장도, 돈도 없고 영어를 할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금문교에 가서 죽어버릴까 생각도 자주 했는데 어딘지를 몰라서 못 죽었어.”

◆애증의 나라, 미국

절망 속에 빠져있던 왕자씨를 바꾼 건 한순간의 생각이었다.

“어느 날 집 앞 공원을 걷는데 햇살이 너무 눈부신 거야. 그때 ‘일이라도 해봐야겠다’고 생각했지.”

처음 취직한 곳은 한 일식당이었다. 그 사이 신씨와는 동거 9개월 만에 이혼했다. 왕씨에게도 결별을 통보했다. 일식당에서 나와 중식당, 안경장사, 가정도우미, 한의원 보조 등의 일을 했다. 길게는 하루 9시간씩 근무했다.

돈을 벌지 않으면 굶어야 했다. 매일 일을 해야 생활할 수 있었기 때문에 아이도 원하는 대로 낳기 힘들었다. 신씨 이후 두 명과 결혼했지만 임신할 때마다 아이를 지우길 반복했다. 그렇게 받은 낙태수술이 모두 7번.

“매일 돈 벌러 다니니까 애를 돌볼 시간도 없고 봐 줄 사람도 없잖아. 애 엄마인 걸 알면 일자리도 못 구해. 어쩔 수가 없었던 거야. 당장 내가 먹고 살려면 애를 지워야했던 거지.”

치열하게 일하면서 눈치는 저절로 빨라졌다.

“객지에서 살면서 배운 거라곤 눈치 말고 더 있겠어. 영어 모르는 걸 티낼 수는 없잖아. 한의원에서 일할 때 전화로 주소를 불러주는데 스펠링을 모르니까 발음하는 대로 한글로 다 받아 적은 거야. 그렇게 해서 물건을 보내고 그랬어.”

오늘날 왕자씨에게 미국은 ‘애증의 나라’로 기억돼 있다. “여기 와서 만고풍상을 다 겪은 사람이에요. 지나고 나니까 이제야 추억이 되고 행복했던 기억만 남지. 지금은 부동산업을 하면서 편하게 살고 있어요. 그래도 그때로 돌아간다면 절대 미국엔 안 올거야 나는.”

글·사진=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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