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밥 한 그릇

  • 이창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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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2   |  발행일 2017-07-22 제23면   |  수정 2017-09-05
20170722

밥상 위에 올라오는 밥 한 그릇의 원가가 얼마쯤이나 될까 하고 궁금한 적이 있었다. 마트에서 20㎏ 쌀 한 포대가 5만원쯤 한다 하니 한 되 값은 4천원 정도 될 것이다. 쌀 한 되로 밥을 지으면 대충 열대여섯 그릇이 나온다고 한다. 그렇다면 담기 나름이고, 그릇 나름이기는 하겠지만 밥 한 그릇의 값이 300원쯤 된다는 계산이 나온다. 밥값이 참 싸다. 싸도 너무 싸다. 라면의 절반 값에도 미치지 않는다. 그런데 이 300원짜리 밥 한 그릇을 얕보았다가 큰 코를 다친 적이 있었다.

그리 멀게도 가깝게도 지내지 않는 지인으로부터 몇 차례나 밥 한 그릇을 먹자는 제의가 와서 결국 불려나간 일이 있었다. 그 무렵 지인은 무슨 ‘씨잘데 없는’ 동네모임의 대표 자리를 탐내던 중이었다. 그런데 그 자리에 경쟁자가 있다고 했다.

밥상 앞에 마주 앉자마자 지인은 은근슬쩍 상대방이 욕심이 많은 사람이라서 탈이라고 했다. 얼굴에 욕심이 덕지덕지 붙었다고 했다. 좁은 동네에서 이것저것 다하고 있으면서 이런 자리까지 차지하려는 심보가 뭐냐고 했다. 그 사람을 어렴풋이 알고 있던 나로서는 머릿속에서 ‘그 사람 그리 욕심 없는데’ ‘그 사람 하는 일이 대체로 떠밀려 맡은 일인데’ 하는 생각을 떠올렸다. 하지만 입에서는 엉뚱하게도 “그렇게 욕심이 많은 사람이야?” 하는 말이 나오고 말았다. 순전히 300원짜리 밥 때문이었다. 입에 들어가 열심히 씹고 있는 공짜 밥이 나도 모르게 그의 말에 맞장구를 치게 한 것이다.

지인은 신이 나서 이번에는 상대방이 완전 사기꾼이라고 했다. 모임 앞으로 무슨 보조금이 나온 것이 있는데 총무를 맡으면서 중간에서 싹둑 잘라먹었다는 것이다. 그런 사람이 모임을 맡아서 되겠느냐며 강한 반어법으로 나에게 물었다. 또다시 머릿속에서는 ‘그럴 사람이 아닌데’ 하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어찌한다. 내 입에서 나온 말은 “그런 일이 다 있었어?”하는 경쾌한 추임새였다. 밥 한 그릇이 참으로 민망한 입을 만들어냈다.

지인은 밥의 위력을 확신이라도 한 듯이 나에게 마지막 멘트를 날렸다. 그 사람의 사생활이 복잡하다는 것이었다. 술만 먹으면 짐승이 된다고도 했다. 그러면서 또 내 눈을 바라보며 대답을 기다리는 눈치였다. 나는 절대로 그럴 사람이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그 사람의 원만한 인품을 잘 알면서도 “거참, 몹쓸 사람이네” 하는 말을 내뱉고 말았다. 윤기 흐르는 쌀밥 한 그릇을 뚝딱 해치우고 난 뒤였다.

입가심으로 맥주 한 잔을 받아들고 후회가 쓰나미처럼 밀려들기 시작했다. 300원짜리 밥 한 그릇에 대해 내가 너무나 큰 보답을 한 것 같았다. 물론 밥을 짓는데 전기도 들고, 물도 들고, 인건비도 있으니 옳게 계산해 보면 한 그릇에 천 원은 될 것이다. 깍두기에 멸치조림이며, 짭짤한 두부찌개까지 보탰으니 밥값을 만 원으로 잡을 수도 있겠다. 하지만 아무리 곱씹어도 그 대가로 남의 인격을 깎아내리는 일에 너무나 쉽게 동조하고 말았다. 아니, 나는 그냥 듣기만 하고, 대답만 했을 뿐이라고 핑계를 붙여도 찝찝하기 그지없었다.

300원짜리 밥 한 그릇이라고 그렇게 만만하게 볼 게 아니었다. 멀쩡한 사람에게 수백 배, 수천 배의 해코지가 될 수 있는 게 밥 한 그릇이었다. 그보다 저 지인이 당장 상대방에게 “홍모씨도 당신을 몹쓸 사람이라고 카더라” 하고 떠들어댈 것이 분명하니 인간관계마저 끊어질지도 모를 일이었다. 밥 한 그릇이 몇날 며칠 전전긍긍해야 할 걱정거리로 되돌아왔다. 홍억선 (한국수필문학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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