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규홍의 시시콜콜 팝컬처] 허상인 듯 실재로 다가온 그것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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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1   |  발행일 2017-07-21 제41면   |  수정 2017-09-05
핑크 플라밍고 튜브는 마이애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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핑크 플라밍고 튜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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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화 ‘마이애미의 두 형사’

학창시절 수업시간에 사탕이나 과자를 선생님 몰래 입에 넣고 공부하던 추억을 나만 갖고 있는 건 아닐 테다. 요즘도 나오는지 모르겠는데, 고등학교 다닐 때 나는 자두맛 사탕을 참 좋아했다. 여름 과일 자두 농축액으로 진짜 굳혔는지 알 수는 없지만, 아무튼 나는 진홍색 사탕 알맹이를 보기만 해도 입에 침이 고이곤 했다. 흔한 말로, 그렇게 수업시간에 몰래 하는 군것질이 더 맛있다고는 한다. 내가 이 명제를 조금 바꾸면 수업시간의 무미건조함을 은밀한 군것질로 좀 달랠 수 있었다. 내가 어느 정도 나이를 먹으면서부터 남들 모르게 사부작사부작 즐기는 무엇이 있다. 뭔가 하면, 코스프레다.

코스튬플레이를 하고 길거리에 나서는 사람에게는 시선이 쏟아질 법한데, 난 예외인 것 같다. 왜 그런가 하니, 그냥 평범하게 차려입은 듯한 나만의 코스프레라서 그런 걸 거다. 내가 흉내 내는 캐릭터는 소니 크로켓, 1980년대 후반에 MBC에서 방송하던 외화 ‘마이애미의 두 형사’ 주인공이다. 돈 존슨이 연기한 이 형사 캐릭터는 그 시절 미국 대중문화를 상징하던 하나의 아이콘이었다. TV드라마임에도 피와 살점이 튀고, 종종 야한 장면도 많이 나왔고(그래서 좋았나?), 경찰과 악당이 갖는 선악이 분명하지 않았다. 좌우지간 드라마는 어떻게 하면 소니 크로켓을 카메라 앵글에 멋지게 담아낼까 고심한 듯 주인공을 띄웠다.

뜨거운 마이애미 해변의 햇볕 아래에서 주인공은 엄지 검지 사이에 담배를 쥐고, 테스타로사 스포츠카를 몰았다. 레이밴 선글라스에 흰색 아니면 파란색 아르마니 재킷과 에벨 금장 손목시계, 그리고 무엇보다 흰색 에스파드리유 구두를 발목을 드러낸 채 신었다. 그는 양말을 신지 않고 신을 신는 패션의 선두주자였다. 드라마에서 그가 한 건 뭐든 유행이 되었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그건 미국 이야기고 내가 사는 여긴 달랐다. 그때나 지금이나 많은 사람은 소니 크로켓을 모른다. 어쩌면 이건 교실에서 녹여먹던 자두맛 사탕보다 더 달콤한 재미다. 그저 난 평범하게 출퇴근하고 그럭저럭 내 할 일을 하지만, 사실은 그게 코스프레였다니. 남들이 몰라보니까 눈치 볼 것 없이 나는 소니 크로켓 형사가 가졌던 모든 걸 하나씩 사들였다. 이따금 내 수준을 넘는 사치의 상당 부분은 그 사람과 연관되었을 거다.

외화 ‘마이애미의 두 형사’ 열성팬인 나
여태 크로켓 형사의 모든 것 코스프레

도시 이미지로 각인된 오프닝의 홍학떼
최근 물놀이 튜브로 허니문 필참물 등극
뽐냄·인생 사진찍기 놀이로 고행도 감수


이쯤이면 마이애미의 두 형사 열성팬이 분명한데, 난 여태껏 마이애미를 안 가봤다. ‘마이애미의 두 형사’가 나온 지 한 세대가 지나서 지금은 많이 바뀌었겠지만, 아무튼 화면 속의 마이애미는 근사한 도시다. 드라마가 시작되기 전 오프닝을 보면 맨 먼저 핑크 플라밍고, 그러니까 홍학 떼가 날개를 펴고 마치 얀 해머의 주제곡에 맞춰 춤을 추듯 등장한다. 뒤이어 미식축구단 마이애미 돌핀스, 경주하는 그레이하운드 개들, 물살을 가르는 보트와 해변의 빌딩숲이 나오지만 내 머릿속에서 마이애미란 도시는 플라밍고가 하나의 이미지로 박혀있다. 마이애미의 홍학 떼는 남극 펭귄이나 멕시코 선인장처럼 학습된 간접체험이며 동시에 상징물이다. 미국 남부인들에게 플라밍고는 뭔가 특별한 존재가 틀림없다. 미국의 딴 지역을 가더라도 홍학 모양의 장난감이 곰돌이인형만큼이나 흔하게 보인다. 그래서 이런 홍학이 여름철 물놀이에 둥둥 떠다니는 튜브로 탈바꿈한 건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이것보다 유난스러운 사실이 몇 해 전부터 인스타그램을 중심으로 벌어지고 있다. 인터넷에는 분홍색 플라밍고 모양의 튜브에 탄 사람들이 사진을 올린다. 우리나라에서는 소녀시대 튜브라고 알려지기도 했고, 신혼여행의 필참물이라고도 한다. 한국의 신혼부부들이 가는 곳이 동남아시아로 뻔히 정해져 있다면, 해변 휴양지에서 물놀이는 빠지지 않을 테고 즐거운 순간을 영원히 붙잡아둘 만한 이벤트가 필요하다. 여기에 플라밍고 튜브가 빠지지 않는단다. 그런데 이 녀석 크기가 엄청난 탓에 만약 입으로 바람을 불어넣는다면 엄청난 기력이 소모될 게 뻔하다. 이렇다면 도구를 쓰는 게 좋은데도 현지에서 올라오는 인스타그램에 #표 태그에는 입으로 바람 넣는다고 고생했다는 주석이 따라 붙는다. 왜냐하면 고행과정도 뽐냄의 일부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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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것을 보면 최근의 물놀이는 정확하게는 물놀이가 아니라 사진찍기 놀이인 듯하다. 좀 더 정확한 말은 사진을 올려서 남기기 놀이가 맞지 않을까. 많은 사람들은 SNS에 사진이나 글을 올리고 사람들에게 관심 받길 원한다. 그 와중에 바보짓을 벌이는 건 덤이다. 하지만 그건 나쁜 것도 좋은 것도 아니다. 그냥 현대인이 과거 사람보다 똑똑해진 점이 많아진 것처럼 당연한 모습이다.

사람들이 인터넷으로 인생을 이토록 낭비하면서 실현하고자 하는 그 끝은 어딜까? 철학자처럼 말하자면, 진선미를 동시에 완벽히 갖춘 상태를 이데아라고 부를 수 있다. 현실 세계에서는 절대로 이루어지지 않는 이데아계는 거기에 근접할 만큼 똑똑하고 사려 깊고 멋진, 일련의 스타들을 통해 모방, 미메시스계로 드러난다. 그들 뛰어난 사람에 비하자면 평범하기 짝이 없는 나 같은 사람은 ‘마이애미의 두 형사’ 같은 모방된 재현물을 또다시 모방하는 셈이다. 이걸 시뮬라크르라고 하던가. 요렇게 흉내 낸 걸 또 흉내 내는 허상의 도구를 시뮬라시옹이라고 하고. 홍학 튜브처럼 조악한 공산품이 멋지게 보인다면 이건 한심한 자아도취일 수도 있다. 하지만 이런 재미라도 없으면 우리는 이처럼 삭막한 현실을 어떻게 버텨나갈까.

P&B 아트센터 아트디렉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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