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칠곡 가산산성

  • 김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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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21   |  발행일 2017-07-21 제37면   |  수정 2017-09-05
임란·호란 트라우마에 쌓고, 쌓고, 또 쌓은…3중의 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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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산성 외성의 남문이자 산성 전체의 정문. 1954년 폭우 때 큰 피해를 입었고 1980년에 중수되어 오늘에 이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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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원정사 경내에 있는 관찰사 이세재의 불망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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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산성 동문. 성의 안쪽은 홍예, 밖은 네모진 문으로 거의 옛 모습 그대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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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산산성 동문 양쪽의 성벽. 10만 명 이상의 사람들이 하나하나 돌들을 쌓아 굳건한 벽을 만들어냈다.

기억을 더듬어 본다. 동명저수지와 송림사를 지나 한티 방향이었지. 가산산성을 찾아가는 길은 지도가 필요 없을 만큼 익숙했다. 이따금 한티재 넘어 대구로 향할 때마다 가산산성 이정표를 스쳐 지나간 때문이다. 가산산성을 마주한 것은 20여 년 전. 그때가 처음이자 마지막이었다. 주차공간은 성문과 좀 더 가까웠고, 문 앞에서의 전경은 가까운 숲으로 인해 좀 더 아늑했으며, 트럭에서 팔던 어묵은 무려 500원이었다.

외침 대비해 인조·영조·숙종 걸쳐 완성
정문인 남문 樓엔 ‘영남제일관방’ 현판
해원정사엔 외성 축조한 이세재 불망비

길 가 ‘6·25 전사자 유해 발굴지’ 안내판
전쟁 당시 대구 방어선이자 혈전지 방증
동문의 독특한 구조는 옛 모습 그대로



◆칠곡, 가산, 외성, 정문

성문은 부쩍 커진 느낌이다. 주차장이 넓어졌고 문 앞의 터도 넓어졌고 전경은 먼 산까지 환하다. 어묵을 팔던 트럭은 보이지 않고 작은 매점이 들어서 있다. 생각보다 주차된 차가 적다. 주차장 한쪽에는 문화재 복원단의 사무실이 자리하고 작은 텐트 하나가 잠들어 있다. 해는 동남하늘에 높게 자리했다.

가산(架山)은 팔공산 비로봉의 산맥이 서북쪽으로 15㎞ 내달린 지점에 위치한다. 산정부는 상당히 넓은 평지인데 7개의 봉우리가 에워싸고 있어 일명 칠봉산(七峰山)으로 불린다. 군의 이름인 칠곡(漆谷)이 가산의 ‘칠곡(七谷)’에 근원한다니 군의 어머니 산인 셈이다. 보통 팔공산 가산산성이라 한다. 가산은 팔공산에 밀리고 산성에 눌려 잊힌 것 같다.

큰 돌로 튼튼하게 쌓아 올린 성벽 가운데 홍예문이 열려 있다. 가산산성의 정문인 남문이다. 문 위에 누각이 올라 서있고 ‘영남제일관방(嶺南第一關防)’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영남 제일의 방호 시설이라는 뜻일 게다. 가산산성은 임진왜란과 병자호란을 겪은 이후에 축성되었다. 외적·내적 상처가 얼마나 컸던지 외성, 중성, 내성 세 겹으로 쌓았다. 내성 축조는 인조 때인 1640년, 중성은 영조 때인 1741년, 외성은 숙종 때인 1700년. 긴 시간이다.

정문 안 커다란 나무 아래에서 할머니 세 분이 차를 마시고 계신다. “지난밤에 이따만 한 뻘건 지네가 김치냉장고 밑으로 도망갔는데 그놈을 잡을라고….” 영국식 추리소설 같은 장면이 우거진 이파리들 뒤로 서서히 멀어진다. 산 숲의 맛이 달다. 유난스러운 단맛이다. 할머니들의 티타임에는 케이크도, 과자도 필요 없겠다. 환한 텃밭을 지난다. 상자 같은 집과 초록 넝쿨 지붕을 인 평상도 보인다. 가만 보니 입구의 엉성한 문에 빨간 우편함이 달려 있다. 누군가의 집일까. 남문 안에는 오래전 남창마을이 있었다고 한다. 1954년 7월 큰비가 내렸고 약 50가구 200명이 살던 마을은 절반이 매몰되었다고 한다. 사라진 마을을 상기시키는 집이다.

◆성내 절집 해원정사

갑자기 숲 문이 열리면서 금강역사 두 분의 무서운 얼굴과 마주친다. 해원정사(解圓精舍)다. 성내 절집인 해원정사는 1965년에 용성사라는 이름으로 창건되었다가 1981년에 현재의 이름으로 개칭되었다 한다. 옛날 가산산성에는 4개의 절집이 있었다는데 그 터는 아닐는지. 멀리서 백구가 컹컹 짖었고, 절대로 놀라지 않았다는 듯이 밀적금강과 나라연금강 사이를 당당히 걸어 대웅전으로 향한다.

석탑과 석등과 나무와 분재와 수석이 많은 절집이다. 잘 손질된 나무들은 경내를 분리하고 또 잇는다. 대웅전 뒤쪽을 향해 나아가면 요사채를 지나고 해탈대를 지나고 나한전을 지나 산신각과 나란한 비각에 닿는다. 돌담을 두른 단 높은 터에 ‘이세재불망비(李世載不忘碑)’를 모신 비각과 6기의 비석이 있다. 가산산성의 외성 축조를 주도한 이가 관찰사 이세재다. 불망비는 숙종 34년인 1708년 백성들이 세웠다. 동명면 남원리의 주민들은 매년 정월 보름날 이세재의 제사와 동제를 지낸다고 한다. 비석에 기도를 하면 소원이 이루어진다는 전설도 있다. 신망과 존경의 깊이는 추모의 시간과 비례할 것이다.

◆내성의 동문으로

절의 오른쪽으로 비켜 오르자 아스팔트길이다. 곧 탐방지원센터가 나타난다. 주변에 차들이 잔뜩 주차되어 있다. 많은 등산객들이 정문이 아닌 이곳 등산목에서 산행을 시작한다. 길 가에 ‘6·25 전사자 유해 발굴 기념지역’ 안내판이 있다. 가산산성은 6·25전쟁 당시 대구 사수를 위한 중요 지형이자 혈전의 장소였다. 2000년에 시작된 유해발굴은 11년 동안 진행되었고 국군 전사자 26구를 찾아냈다고 한다. 그분들은 이제 산을 떠나 현충원에 계신다.

잠시 블록 길이 이어진다. 가운데에 탄탄하게 짠 거적이 깔려 있어 폭신하다. 치키봉과 동문의 갈림길에서 동문을 향해 숲으로 든다. 동문까지는 3.2㎞. 숲 속은 그늘이다. 매미들이 운다. 맴. 맴. 단호하고 박정한 맴, 맴이다. 새들은 울거나 노래한다. 성벽의 일부로 보이는 돌담들이 군데군데 수풀 속에서 모습을 드러낸다. 숲길이 임도로 올라선다. 동문까지 2.7㎞. 새소리도 매미소리도 없는 임도를 오기 있게 걷는다. 갑자기 안개가 밀려들고, 복수초 군락지가 펼쳐진다. 신비로운 숲에 꽃은 보이지 않는다.

이제 동문이다. 성 안쪽은 홍예, 밖은 네모진 문이다. 거의 옛 모습 그대로라 한다. 문 좌우로 영원한 날개처럼 성벽이 이어진다. 내성은 약 7개월 만에 완성되었다. 만추에서 초봄까지 10만 명 이상의 인력과 막대한 자금이 동원되었고 가혹한 독려는 많은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동문 앞에는 수문지의 발굴 조사가 진행 중이다. 한쪽에 돌들이 모여 있다. 돌들은 다시 일어서기를 기다리고 있었고 성벽 위로 솟아 오른 나무는 초혼처럼 흔들렸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55번 중앙고속도로 칠곡IC로 나가 5번 국도를 타고 동명방향으로 향한다. 동명네거리에서 우회전해서 가다 기성삼거리에서 좌회전한다. 한티재 방향으로 계속 오르다 왼쪽에 가산산성길로 들어가면 된다. 진남문 앞과 등산목에 주차장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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