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남시론] 천치 같은 천재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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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9   |  발행일 2017-07-19 제31면   |  수정 2017-09-05
20170719

국민의당 제보조작 사건에 대해 안철수 전 대표가 긴 침묵 끝에 자신은 몰랐다는 변명에 불과한 사과문을 발표하고 머리를 숙였다. 어려서부터 천재라는 소리를 듣고 자랐음직한 서울대 의대 출신의 의사요, IT 전문가이며, ‘세계적 석학’으로까지 칭송받던 사람이 온 국민이 머리를 갸우뚱할 정도의 어설픈 제보를 사실이라 믿었다? 그뿐 아니다. 그 사건과 연관된 국민의당 당직자들의 과거 이력을 보면 이들도 역시 어렸을 때는 분명 천재 소리를 한두 번은 듣고 자랐을 법한 사람들인데 자신들은 감쪽같이 속았다고 강변한다. 검사 출신의 국회의원들이 최소한의 판단력도 없는 천치라는 고백을 하고 있는 꼴이다.

한국사회에서 보통 천재라고 하면 수능 만점이나 의대 수석합격, 아니면 대학 2·3학년 때 일찌감치 고시에 합격한 사람들을 일컫는 경우가 많다. 젊은 나이에 고시 3과를 다 통과하면 천재 중의 천재라는 소리를 듣게 된다. 이런 천재들이 가진 능력은 사실 창의성이나 상상력과는 무관한 암기능력이라고 할 수 있다. 반면에 서구사회의 천재에 대해서는 칸트가 명쾌하게 정의한 바 있는데, ‘예술에 규칙’을 부여할 수 있는 판단력을 가진 사람, 즉 예술가들을 일컫는다. 그 판단력이란 ‘특수를 보편에 포섭하여 사유하는 능력’으로, 자연은 천재들의 판단력을 통해 ‘예술에 대해 규칙을 지정한다’고 했다. 그런데 의사, 법률가, 정치가들은 법이나 규칙, 공식을 이해하고 암기하는 오성의 능력은 뛰어나지만 천부의 판단력은 결핍되어 자신들의 지식을 적용하는 데는 늘 과오를 되풀이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칸트의 평가다. 칸트는 판단력이 결핍된 것을 천치와도 같은 것이라고 했다.

의사, 판검사, 교수 같은 전문직들의 한계는 자기 분야 이외의 영역에 대해서는 거의 천치와도 다를 바 없는 판단력을 가졌다는 것과, 자기 분야에서도 이중적인 속성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병을 고치는 전문가라면 병을 걸리게 하는 데도 전문가일 것이며, 죄인을 잡는 전문가라면 멀쩡한 사람을 죄인으로 둔갑시키는 데도 탁월한 능력을 가진 사람일 것이다. 누가 봐도 외부 충격으로 뇌사상태에 빠진 사람을 억지로 살려놓고 지병으로 죽었다고 주장하는 서울대 의대 교수나 아무 죄도 없는 사람을 조작된 증거로 파렴치한 범죄자로 만들어버렸던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에 관련된 검사들이 전문직들의 이중적 속성을 증명하는 전형적인 사례라고 볼 수 있다. 플라톤은 일찌감치 전문직이 가진 이런 이중적 속성을 간파하고 전문직이 가진 순기능만을 유지할 수 있도록 하는 견제장치가 필요함을 역설했다.

그런데 서울대병원 측은 자신들의 병원에 소속된 의사의 과오를 인정하고 사과를 했지만, 법원은 강기훈씨 유서대필사건에 관여한 검사들의 책임을 물을 수 없다고 했다. 죄는 인정되지만 공소시효가 지났다는 이유에서다. 공소시효와 관련된 법 규정만 달달 외운 천재 판사가 내린 앙증맞은 판결이기도 하고, 국가기관이 개입된 특수한 범죄적 사건을 인류의 보편적인 양심과 상식에 포섭하여 사유할 능력이 없는, 천치 같은 판사가 내린 부정의한 판결이다.

군부가 이 나라의 정치를 쥐락펴락하던 시절, 박사 위에 육사가 있고, 육사 위에 여사가 있다는 말들이 시중에 떠돌았다. 1987년 유월항쟁 이후 정치의 전면에서 육사와 여사는 사라졌다. 그 빈자리를 꿰차고 들어온 세력이 학연·지연·혈연으로 똘똘 뭉친 판검사, 교수, 의사 같은 전문직들이다. 국민의당 제보조작 사건은 정치인으로 변신한 이들 전문직이 최소한의 상식적인 판단력도 없는 천치들에 불과하다는 칸트의 철학을 입증한 사건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전문직들의 전문성은 인정해주되 그들에게 결핍된 판단력을 보완해 줄 그 무엇이 반드시 필요하다. 그것은 바로 열린 광장에 모여든 시민들의 건전한 상식과 민주주의에 대한 열정과 철학 아니겠는가. 우리 사회의 요직을 독점하고 있는 전문직들의 전횡을 시민사회가 견제하지 못한다면 민주주의는 아직 먼 나라 이야기일 수밖에 없다. 김진국 (신경과 전문의)


임성수 s018@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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