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20] 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마오- 사마상여와 탁문군(上)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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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7-13   |  발행일 2017-07-13 제22면   |  수정 2017-07-13
中 전한시대 ‘겁없는 사랑’…17세 부호의 딸, 가난한 문인과 야반도주
20170713

‘아름다운 낭자가 규방에 있으나/ 방은 가까워도 사람은 멀어 애간장이 타는구나/ 어떤 인연이면 그대와 한 쌍의 원앙이 되어/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까’. 사마상여(司馬相如)가 부호의 딸인 탁문군(卓文君)의 마음을 얻기 위해 지어 부른 노래 ‘봉구황(鳳求凰)’의 일부다. 자신을 봉(鳳)에, 탁문군을 황(凰)에 비유하며 서로 마음껏 사랑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을 담고 있다. 중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사랑 이야기로 꼽히는 사마상여와 탁문군의 이야기다.

◆가난한 선비, 부호의 딸에게 구애하다

전한(前漢) 시대 문인인 사마상여(기원전 179∼117)는 쓰촨성 청두(成都)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글재주가 뛰어났다. 뛰어난 문인인 그는 처음에 재물을 관에 기부하고 한나라 황제 경제(景帝)를 섬기며 벼슬을 했지만, 경제가 문학을 좋아하지 않았기에 자신의 뜻을 펼치지 못했다. 반면에 경제의 아우인 양(梁)나라 효왕(孝王)은 문인을 우대했다. 그래서 한나라의 관직을 내놓고 양나라로 갔다. 하지만 얼마 안 되어 효왕이 죽자 고향으로 돌아가 가난하고 궁핍한 생활을 하며 지내야 했다.

어느 날 친하게 지내던 쓰촨성 린충(臨)의 현령인 왕길(王吉)이 찾아와 같이 지낼 것을 요청했고, 사마상여는 성안에 들어가 도정(都亭)에 머물게 되었다. 그리고 왕길이 다스리는 성안에는 부자가 많았는데, 그 중 탁왕손(卓王孫)은 노비가 800명이나 되었다.

사마상여가 왕길 덕분에 린충에서 머무르고 있을 때, 린충의 대부호 탁왕손이 베푸는 연회에 초대를 받았다. 사마상여는 탁왕손의 연회에 주빈으로 초대받고 병을 이유로 거절했으나, 현령이 직접 찾아와 같이 갈 것을 요청해 할 수 없이 따라 나서게 되었다.

쓰촨성 청두 출신 사마상여 글재주 뛰어나
과부 탁문군에 매료돼 ‘봉구황’ 지어 불러


그런데 탁왕손 집에는 용모도 아름답고 문재(文才)도 뛰어나며 악기도 잘 다루는 탁왕손의 딸 탁문군이 있었다.

‘문군은 용모가 아름다웠다. 눈썹은 마치 먼 산을 바라보는 것 같았고, 뺨은 마치 연꽃과 같았으며, 살과 피부는 부드럽고 윤기가 도는 것이 부용과 같아 열일곱 나이보다 앳되어 보였다(文君好 眉色如望遠山 際常若芙蓉 肌膚柔滑如脂 十七而寡).’

탁문군의 미모를 묘사한 이 글에서 중국 미인의 조건인 ‘먼산을 바라보는 듯한 둥근 눈썹(遠山眉)’ ‘연꽃같이 붉은 뺨(蓮花頰)’ ‘부용같이 부드러운 피부(芙蓉膚)’라는 말이 나왔다.

탁문군은 16세 때 부친의 동업자 자식과 결혼했지만 오래 가지 못했다. 몇 개월 되지 않아 남편이 죽자 그녀는 17세 나이에 청상과부가 되어 친정에 와 머물고 있었던 것이다. 사마상여는 이런 탁문군에 대해 소문을 듣고 알고 있었다.

왕길과 탁왕손은 연회에서 당대 문장가요 연주가로 이름 높은 사마상여에게 한 곡을 청했다. 사마상여는 탁문군이 자신을 엿보며 듣고 있음을 알고, 그녀의 마음을 얻기 위해 ‘봉구황’을 지어 부르며 거문고를 연주했다.

‘봉(鳳)이여, 봉이여 고향에 돌아왔구나(鳳兮鳳兮歸故鄕)/ 너(凰)를 찾아 사해를 헤맸지만(遊四海求其凰)/ 때를 못 만나 뜻을 이루지 못했는데(時未遇兮無所將)/ 오늘 밤에 이 집에 올 걸 어찌 알았겠는가(何悟今夕升斯堂)// 아름다운 낭자가 규방에 있으나(有艶淑女在閨房)/ 방은 가까워도 사람은 멀어 애간장이 타는구나(室邇人遐毒我腸)/ 어떤 인연이면 그대와 한 쌍의 원앙이 되어(何緣交頸爲鴛鴦)/ 함께 저 높은 하늘을 날 수 있을까(胡兮共翔)// 황(凰)아, 황아 나에게 깃들어(凰兮凰兮從我棲)/ 꼬리를 맞대고 오래오래 사랑 나누어 보세(得托尾永爲妃)/ 정 나눠 몸과 마음 하나 되어(交情通體心和諧)/ 밤늦도록 서로 따른들 누가 알겠는가(中夜相從知者誰)/ 두 날개 활짝 펴고 하늘 높이 날아올라(雙翼俱起高飛)/ 더는 나를 슬프게 하지 마오(無感我思使余悲)’

◆함께 야반도주한 두 사람

탁문군 또한 어릴 때부터 음률을 알기에 사마상여의 ‘봉구황’을 듣고 바로 그 뜻을 알아챘다. 그녀는 모든 면에서 출중한 사마상여의 매력에 빠지게 되었다. 그날 밤 사마상여의 마음을 알게 된 탁문군은 그에 대한 연모의 정을 참지 못하고 사마상여와 몰래 만나 서로의 사랑을 확인했다. 17세의 탁문군과 30대 중반의 사마상여는 밤을 새우며 사랑을 나눴다.

하지만 대부호의 외동딸과 가난한 문학가의 사랑은 이루어지기 어려운 것이 현실이었다. 이를 잘 아는 두 사람은 모두가 잠든 틈을 이용해 사마상여의 고향인 청두로 야반도주하게 되었다. 당시 야반도주는 상상하기도 힘든 대범한 선택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궁핍한 살림에 탁문군 요청으로 주점 차려
술장사 생활 실망도 하지 않고 진실한 사랑


탁문군과 사마상여가 말을 타고 달려 쓰촨성 청두로 돌아왔으나 그 집은 너무나 빈한했다. 집에 있는 것이라고는 네 벽뿐이었다.

고사성어 ‘가도사벽(家徒四壁)’이라는 고사성어가 여기서 나왔다. 집안 형편이 빈한한 것을 비유하는 말인데 ‘가도벽립(家徒壁立)’이라고도 한다.

‘사기(史記)’ 중 ‘사마상여열전(司馬相如列傳)’에 다음과 같은 구절이 있다.

‘탁문군이 밤에 사마상여에게로 도망쳐 나오자 사마상여는 탁문군과 함께 말을 타고 달려 청두로 돌아왔는데, 집안에는 아무것도 없이 네 벽만 세워져 있었다(文君夜亡奔相如 相如馬馳歸成都 家徒四壁立)’.

탁왕손은 자기 딸이 다른 사람과 함께 달아났다는 것을 알고는 크게 화가 났다. 그리고 주위 사람들에게 “딸은 정말 쓸모가 없구나. 나의 딸이라서 죽이지는 않겠지만, 못난 딸에게 돈 한 푼도 주지 않겠다”고 말했다.

사마상여는 원래 가난한데다가 탁문군까지 같이 있으니 청두에서의 생활은 극도로 어려울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탁문군의 요청으로 다시 린충으로 돌아와서 살 궁리를 하다가, 탁문군이 어디서 구한 돈으로 조그만 주점을 하나 차리게 되었다. 가난해도 사마상여를 진정으로 사랑한 탁문군은 직접 손님을 접대하며 술을 팔았고, 사마상여도 허드렛일을 하고 설거지를 하며 술장사를 도왔다.

사마상여가 그렇게 가난한 남자임을 알고도 탁문군은 실망하거나 집으로 돌아갈 생각을 하지 않고 어려운 생활 속에서도 진실한 사랑을 일궈갔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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