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디아스포라 눈물을 희망으로] <4부> 1. 하와이 인권변호사 에스더 정희 권씨

  • 최보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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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26   |  발행일 2017-06-26 제6면   |  수정 2022-05-18 17:24
사회적 약자 법률 지원 매진…하와이 ‘올해의 여성변호사상’ 받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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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5월28일 하와이 호놀룰루에서 권영철·정희 남매를 만났다. 남매는 대화 중 “아이고 죽겠다” 라고 하는 등 이따금씩 한국어를 사용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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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도인·이희경 부부. 권씨는 양복, 이씨는 한복을 입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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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버지 권도인과 장녀 정숙씨.

‘지상낙원의 꿈’이 깨지는 건 한순간이었다. 매일 10시간. 머리 위로 내리쬐는 햇빛을 견디며 자랄만큼 자란 사탕수수를 벴다. 고된 노동 끝에 매달 손에 쥔 돈은 10여달러 남짓. 고향 생각을 잠시도 떨쳐내기 힘들었다. 고국에서 사진신부가 온다는 소식은 마른 땅에 내리는 빗줄기였다. 사진으로 얼굴을 본 신부를 만나 미국에 살림을 차렸다. 미국땅에 한국인 가족이 탄생한 첫 순간이었다. 영남일보는 ‘대구·경북 디아스포라-눈물을 희망으로’ 미국 서부편을 통해 한인 정착기를 들여다볼 예정이다. 동포들의 개인사를 중심으로 한인사회 형성과정을 7회에 걸쳐 따라간다. 첫 회는 미국 한인 이민사의 시작점인 하와이 사탕수수밭 노동자와 사진신부다.

◆“늘 바쁜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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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스더 정희 권(89). 1928년 하와이에서 태어났다. 인권변호사로 생애를 보냈다. 이민법을 전공한 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법률지원활동을 했다.


다문화 사회에 익숙했던 권씨
일본인 배우자 만나 결혼

가구 개발로 美특허받은 아버지
사업 번창하자 독립운동자금 대

어머니는 영남부인회 조직 활동
딸 데리고 한국 3·1운동 참여도



“돌이켜보면 내 삶은 가난한 사람들을 위해 쓰였어요. 어머니가 생전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살아야한다는 말씀을 많이 하셨는데 지금의 성정은 어머니한테서 온 것 같아요.”

그는 이런 점을 인정받아 92년 하와이 ‘올해의 여성변호사상’을 받았다.

정희씨의 어머니는 대구 출신 ‘사진신부’ 이희경이다. 미국에서 공부하고 싶던 이씨는 한국의 여성과 하와이의 남성이 사진교환만으로 혼인하는 사진신부 제도를 택했다. 당시 사진 이외에 출신지, 성격, 나이 등은 알기 힘들었다. 1912년 바다를 건넌 그를 맞은 건 여섯살 연상의 남편 권도인씨.

남편 권씨는 앞선 1905년 2월13일 시베리아호를 타고 하와이로 건너왔다. 당시 17세의 안동 출신 소년은 사탕수수밭에서 일했다. 월급 2달러를 더 받기 위해 나이를 18세라고 속였는데, 결국 들통나 16달러밖에 받지 못했다. 정희씨는 선친이 이 사실을 맘에 담고 평생 동안 아쉬워했다고 회상했다. 대구·경북 출신 부부는 하와이에서 2남2녀를 낳았다. 막내 정희씨는 아버지와 유독 가까웠다.

유년시절 부모는 “늘 바쁜 사람들”이었다. 아버지는 가정을 꾸린 뒤 개인 사업을 준비했다. 1924년 가구 개발로 미국 특허를 받았고 이를 토대로 28년 가구점을 열었다. 나중엔 샌프란시스코에 지점을 낼 정도로 번창했다.

“어릴 땐 부모님을 뵙기 힘들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는 일요일마다 교회랑 여성모임에 갔고, 아버지는 공장에 가거나 발명품을 생각하기에 바빴어요.”

미국 사회에 뿌리내리려 애쓰던 부모의 빈 자리를 채운 건 장녀 정숙씨. 집에선 ‘두번째 엄마’(second mom)이라고 불렸다.

대구·경북 출신의 부부는 독립운동 지원에도 관심을 뒀다. 선친은 사업으로 번 돈 일부를 독립운동 자금으로 후원했다. 독립운동 지원단체인 대한인국민회 지방회의 회장을 맡기도 했다. 그의 어머니는 일제치하 언니 정숙씨를 데리고 한국으로 가 3·1운동에도 직접 참여했다. 또 하와이 한인사회 부인들과 가깝게 지내며 독립운동을 도왔다. 28년에는 경상도 출신 부인들로 구성된 영남부인회를 조직했다.

◆한국과 미국의 갈림길 선 자녀들

권도인·이희경씨 부부가 하와이에 뿌리를 내리는 동안 자녀들은 서로 다른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을 형성하며 자랐다. 늦게 태어난 영철·정희씨 남매는 ‘다문화 사회’에 더 익숙해졌다.

셋째인 영철씨는 “학교에 들어갔는데 학생 대부분이 중국인이었고, 일본인, 하와이 원주민, 필리핀인이 조금씩 있는거예요. 그땐 영어를 배우려고 모였다고만 생각했죠. 점차 다문화를 경험하면서 한국 사회에서 벗어나려고 했어요. 결국 내가 살아야되는 건 한국이 아닌 미국의 다문화사회였으니까요”라고 했다.

정희씨는 “제2차 세계대전이 터지면서 그나마 있던 한국어 교육기관들도 문을 닫았어요. 한국 식료품점은 물론 라디오방송도 없었고요. 한국인과 미국인의 경계에 있던 우리는 미국 사회에 더 섞일 수밖에 없었습니다”라고 했다.

배우자를 택하는 것도 손위 남매와 달랐다. 생전 일본인과의 결혼을 용납하지 않았던 어머니로 인해 정숙·영만씨는 한국인과 결혼했다. 하지만 영철·정희씨 남매는 일본인 배우자를 만났다.

정희씨는 “작은 오빠(영철)와 저는 당시 하와이에 한국인이 너무 없어 일본인과 결혼했는데 어머니가 살아계셨다면 불가능했겠죠. 일본인과 결혼하면서 한국인으로 남을거냐, 일본인으로 살거냐를 선택받았는데 우리 부부는 그 어느 국가에도 속하지 않기로 했어요”라고 말했다.

하지만 수 년 전 아버지의 생전 나이와 비슷해지자 정희씨는 점차 한국에 대한 애착을 느끼기 시작했다.

“2012년 한국에 갔을 때 한국은 언제나 내 마음 속에 있을 거고 언젠가는 한국에 돌아가겠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우리 부모가 대구·경북민이라는 게 자랑스럽고 나한테는 굉장히 중요해졌어요”.

글·사진=최보규기자 choi@yeongnam.com
공동기획 : 경상북도, 인문사회연구소

※이 기사는 경상북도 해외동포네트워크사업인 <세계시민으로 사는 경북인 2017-미국 서부편> 일환으로 기획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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