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Y인터뷰] 권혁장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사무소장

  • 서정혁,황인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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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24 08:08  |  수정 2017-06-24 08:09  |  발행일 2017-06-24 제22면
“인권침해 현장 우리는 어디든 찾아간다…제보자 신분은 철저히 보장”
20170624

권혁장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사무소장(49)은 ‘문제아’였다. 그는 아버지가 싫었다. 고교 교사였던 아버지는 강압적이고 가족에 무심했다. 아버지가 정해둔 규칙은 합리적이지 않았다. 아버지를 제외한 다른 가족들의 권리는 찾아볼 수 없었다. 쌓여가던 감정은 고교 2학년 말에 폭발했다. 아버지와 크게 싸운 후 그는 공부를 그만뒀다. 일종의 반항이었다.

공부를 하지 않자 다른 것들이 자연스럽게 눈에 들어왔다. 관심사는 사회 도처에 널려있던 사회적 문제들. 그는 4·19혁명 등 한국 현대사의 아픔에 대해 공부하기 시작했다.

대구 덕원고에 다니던 그는 몇몇 친구들과 매일 자취방에 모였다. 토론의 주제는 간단했다. ‘국가가 국민의 인권을 이렇게 무시해도 되는 걸까’. 당시 친구들과 함께 즐겨 낭독하던 신동엽 시인의 ‘껍데기는 가라’처럼 국가는 껍데기의 기능을 상실한 듯 보였다. 알맹이를 보호하지 못하는 국가는 이미 그 기능을 상실했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가 생각한 기본적인 국가는 가해자가 아닌 국민을 지켜주는 든든한 울타리였다.

영남대 전기공학과에 입학한 1987년, ‘박종철·이한열 열사 사건’이 터졌다. 그는 수업을 들을 수 없었다. 속에서 부아가 치밀었기 때문이다. 교수들도 “시국이 이런데 공부는 해서 뭐하냐. 거리로 나가라”며 학생들을 독려했다. 국가에서 학생들을 ‘탁’ 치니 ‘억’ 하고 반응할 수밖에…. 그렇게 7년을 국가와 싸웠다. 경찰의 곤봉에 죽도록 맞아 한 달을 병원에 누워있었던 적도 있다. 국가와 싸운죄로 지명수배가 된 그는 3년간 도피생활을 했다.

1998년, 국민의 목소리를 대변할 진보적 단체의 필요성이 대두되면서 지역에 대구참여연대가 생겨났다. 권 소장은 초대 사무국장을 지냈다. 2004년엔 시민단체들이 연대할 수 있는 ‘대구시민단체연대회의’ 창립을 준비하면서 사무처장을 맡았다. 수차례 지자체와 대구시에 문제를 제기하며 잘못된 것들을 개선했다. 인생의 약 절반을 그릇된 것들에 반대하며 살아온 셈이다.

2007년, 대부분을 국가와 싸워온 그가 명함에 ‘국가’를 새겨 넣게 됐다. 지역에 개소된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사무소장. 현장에서 쌓아온 경험을 토대로 그는 지난 10년간 4만여건의 인권상담과 5천200건의 진정사건을 처리했다. 연간 600회에 달하는 인권교육 역시 10년째 진행해 오고 있다. 교육을 받은 인원만 어림잡아 30만명이 넘는다. 올해는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사무소가 개소한 지 10년째다. 지난 21일 권 소장을 만나 대구 인권의 현주소와 대구사무소의 지난 10년을 돌아봤다.

젊은 시절엔 한국 현대사 아픔에 관심
국민 보호하지 않는 국가에 맞서 싸워 

개소 10년째…주민 연간 100여명 동참       
인권상담 4만건·진정사건 5200건 처리

시립미술관  ‘장애인 저상순환버스’ 등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지역선 큰 변화
 


▶참 오래도 싸워왔다. 1987년 6월항쟁 당시의 분위기를 잘 모르는 사람들도 있다. 당시 지역 분위기는 어땠는가.

“지역의 참여율이 굉장히 높았다. 특히 대학을 졸업한 화이트칼라와 학생들의 참여가 높았다. 대구백화점을 거점으로 경상감영공원, 서문시장, 명덕네거리, 반월당 전체가 시위 인파로 가득했다고 보면 된다. 대구백화점 앞은 지금도 상징적인 의미가 있지 않나. 유동인구가 많아 경찰들도 그곳에 최류탄을 쏘지 못했다. 건물에선 시위하는 시민들을 응원하며 빵을 던져줬다. 말 그대로 ‘빵비’가 내렸다.”

▶폭행도 많이 당했다고 들었다.

“난 양호한 편이었다. 왜소한 몸 때문일 거다. 시위를 하면서 대백 앞 광장에 시위대와 함께 누웠다. 그러자 경찰이 최루탄을 던져 흩어졌는데 국세청(현 노보텔 자리) 인근에서 경찰 7명에게 둘러싸였다. 그 후 기억이 나지 않는다. 몸이 움직이지 않았고 온몸에 멍이 들었다. 한 달이 지나서 몸을 겨우 움직일 수 있었다.”

▶올해가 국가인권위원회 대구사무소 개소 10주년이다. 사무소의 역사와 그동안 노력들을 알려달라.

“2007년 7월1일, 6명의 인력으로 업무를 시작했다. 처음엔 인권상담을 진행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직원들의 직무역량을 키워 지역사회의 요구에 화답하기 위해 각고의 노력을 다했다. 이후 인권상담, 구금보호시설 조사, 인권교육과 홍보, 다양한 협력사업을 할 수 있는 기반이 마련됐다. 10년을 돌아보면 4만여건의 인권상담과 조사업무를 수행했다. 교육도 중요했다. 연 550~600회씩 인권교육을 진행해 왔다. 인권문화 확산을 위해 인권음악회, 영화제 등 다양한 홍보 활동도 진행했다. 사무소 직원만이 아니라 인권 관련 모니터링 사업, 인권기자단, 인권 글쓰기 모임, 인권분야별 네트워크 운영 등에 연간 100명이 넘는 지역주민들이 참여하고 있다.”

▶현재 지역의 인권의식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당연히 나아졌다(웃음). 과거와는 비교할 수 없을 정도다. 예전엔 장애인이 왜 밖으로 나오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반응이 많았다. 아직 개선해야 할 부분들도 많지만 이젠 장애인들도 당당하게 이동권 등 기본적인 권리를 주장할 수 있는 분위기가 안착됐다. 대구시립미술관도 장애인들의 요구에 저상순환버스를 도입하기로 했다. 아주 사소해 보일 수 있지만 지역에선 큰 변화다.”

▶아직도 지역에선 장애인 인권에 대한 인식이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다.

“장애인생활시설에서의 인권문제는 여전히 심각하게 생각한다. 몇 년간에 걸친 진정사건조사 결과 폭행·폭언·감금 등의 가혹행위, 지도감독의 부실 등 심각한 인권문제들이 확인됐다. 소수 몇 명의 일탈행위로 떠넘길 수 없다. 진지한 성찰과 개선의 노력이 절박하다. 일상생활에서도 장애인 이동권, 정당한 편의제공, 재화용역 서비스에 대한 접근권 등은 여전히 부족하다. 장애는 관계의 문제다. 장벽 없는, 배제 없는 사회적 관계를 만들면 장애는 더 이상 장애가 아니다. 사회적 인식의 변화와 공공 사회정책의 변화가 여전히 요구된다.”

▶가장 기억에 남는 사건은 무엇인가.

“대구시립희망원 사건이다. 인권에 대한 경종을 울렸다. 과거의 부정적 관행, 인권에 대한 소홀함 등에 대해 성찰의 계기를 마련했다고 생각한다. 실제 많은 관련 종사자들의 인식이 바뀌고 있다. 조사를 시작하면서 이렇게까지 심각할까 생각했다. 그러나 첫 직권조사에 참여하면서 심각한 상황을 확인했다. 오랜 과거로부터 이어온 관행적 인권침해, 이해되지 않는 사망사건, 끊임없이 나오는 폭행, 가혹행위에 대한 증언, 금전적 비리 등 확인되는 모든 사실이 충격적이었다. 가장 가슴 아팠던 것은 주요 직원들의 무덤덤한 태도였다.”

▶현재 지역에서 인권과 관련해 가장 먼저 선행돼야 하는 것은 무엇인가.

“대구시민, 경북도민의 인권에 대한 의식수준을 조사한 통계가 없다. 대구시와 경북도에는 인권보호와 증진을 위한 조례가 제정돼 있다. 인권증진위원회를 구성하고 5개년 기본계획을 세우고, 연간 실천계획을 수립해야 한다. 계획을 세우는 데 있어 시·도민의 인권의식에 대한 조사는 필수적이다. 지자체가 앞장서서 진단해주길 바란다. 이는 지자체 주요 정책의 기초자료로도 유의미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는 피해자들에게 한마디 해달라.

“우린 어디든지 찾아간다. 제보자의 신분도 철저하게 보장한다. 자신이 인권침해를 당하고 있다면 주저하지 말고 1331번으로 전화를 걸어달라. 인권사무소는 누구에게나 열려 있다.”

글=서정혁기자 seo1900@yeongnam.com

사진=황인무기자 him7942@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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