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칼럼] 따뜻한 말 한마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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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22   |  발행일 2017-06-22 제30면   |  수정 2017-06-22
비탈진 길 오가는 것 같이
정신 없는 우리네 한살이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벽
진솔함 담긴 글귀 한마디
누군가에겐 살아갈 동력
[여성칼럼] 따뜻한 말 한마디
허창옥 수필가

오래 가물어서 저수지가 말라붙고 논밭이 갈라졌다. 뙤약볕 내리쬐는 대지도, 애타게 기다리는 사람들도 목이 마르다. 지하철 2호선을 타기 위해 바쁘게 걸었다. 대구은행역에서 에스컬레이터를 탔다. 내려가는 중에 반대편 벽에서 ‘서두르지 마’ ‘늦지 않았어!’를 읽었다. 그렇지, 늦지 않았어.

순간 양쪽 벽을 빠르게 훑어보았다. ‘토닥토닥’ ‘너무 힘들 땐 조금 쉬어 가렴’ ‘수고했어, 오늘도’가 눈에 들어왔다. 진솔한 마음으로, 그러나 편안하게 흘려 쓴 글씨들이다. 내가 주로 오가는 길이 지하철과 떨어져 있어서 자주는 아니지만 이따금 대구은행역을 이용하는데 무심히 보아왔다. 오늘, 이 짧은 글귀들이 유난히 와 닿는다. 무슨 대단한 경구처럼 느껴진다.

에스컬레이터를 내려서는데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길’ 글귀가 어떤 이의 진심어린 기원처럼 읽힌다. 가던 길을 잠깐 멈추고 돌아서서 올라가는 길과 내려가는 길을 되돌아본다. 미처 못 읽었던 글귀들을 마음에 새기듯 읽는다. 가슴이 따뜻해진다. 나도 누군가에게 이런 말들을 해주고 싶다.

어제 나에게 이 한마디가 절실했다. 오늘 이 말이 듣고 싶다. 내일 이 말들 중 어떤 말인가를 들으면 힘이 날 것 같다. 듣고 싶고, 해 주고 싶은 말들이다. 고단한 도시인들이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에스컬레이터의 양쪽 벽에 이런 말들을 새기겠다는 생각을 최초로 한 사람이 누구였을까. 그에게 고맙다는 말을 전한다.

안내방송은 신남역을 거듭 외친다. 신남역에 내리면 삶이 온통 펄펄 끓는 서문시장에 갈 수 있다. 생존의 수많은 곡절들이 온갖 소리를 만들어내며 살아있는 곳, 그 옛날 ‘큰장’의 향수가 아직 구석구석 남아 있는 이 정겨운 곳을 지나칠 때면 불현듯 내리고 싶어진다. 하지만 오늘의 행선지는 다사에 있는 지인의 매실농원이다.

맞은편에서 초로의 남자가 꾸벅꾸벅 졸고 있다. 아기 엄마가 아이 셋을 데리고 앉아서 나지막하게 얘기하고 있다. “물 먹을래?” “오줌 마려워? 조금만 참아” 따위의 일상적인 말들이다. 휴대폰을 두드리는 젊은 청년, 여학생들, 오후 한때 같은 공간에서 우리들이며 동시에 타인들인 사람들이 각자의 목적지로 가고 있다.

수첩을 꺼내 조금 전 대구은행역에서 읽었던 ‘경구’들을 생각나는 대로 적어둔다. 매순간 모두에게 필요하고, 어떤 특별한 시간에는 세상에 있는 어느 한 사람에게 절실한 말 한마디를 가슴에 고이 새겨두고 싶은 것이다.

올라가는 길이 있고, 내려가는 길이 있다. 오르막길을 걸을 땐 한 발자국이 힘이 든다. 서두르지 않고 꾸준히 가야 하며, 숨이 차면 그 어디 바윗돌이나 나무 그늘에 앉아서 쉬어야 한다. 한 생을 살아가노라면 오르막길이 있고 내리막길이 있게 마련이다. 가파른 길을 지나치게 빨리 올라가다보면 때로 동티가 난다. 쉬며 살피며 올라가야 한다. 그때 그 사람이 도무지 살피지 않고 막무가내 올라간다면 그를 아끼는 누군가가 말해주어야 한다. “서두르지 마, 쉬어가렴” 내려가는 길이 너무 비탈져서 정신없이 떨어졌다가 바닥에 주저앉은 이가 있다면 누군가가 그에게 곡진한 마음으로 말해줘야 한다. “수고했어, 그런데 아직 늦지 않았어! 다시 일어나자.”

“조금만 더 가면 아빠 회사야. 맛있는 거 사 먹자.” 고만고만한 세 아이를 달래는 젊은 엄마를 향해 혼잣말처럼 소심하게 말한다. “당신의 사랑이 늘 행복하길.” 복잡하다 못해 현란하기까지 한 현대인의 삶, 가파르고 비탈진 길을 정신없이 오가는 우리네 한살이에 가만히 얹어주는 따뜻한 말 한마디는 격려가 되고 위로가 된다. 먼지 뿌옇게 일어나는 길을 걷다가 지친 사람의 어깨를 토닥이며 건네는 단비 같은 말 한마디는 살아갈 동력이 된다.

에스컬레이터 타고 다시 지상으로 올라선다. 햇볕은 여전히 쨍쨍한데 여우비 가늘게 뿌린다. 소나기 한나절 시원하게 내렸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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