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창원의 ‘영남일보로 보는 시간여행’ .8] 경찰의 방기자 구타사건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06-22   |  발행일 2017-06-22 제29면   |  수정 2017-06-22
건방지다며 기자 다짜고짜 폭행한 ‘민중의 몽둥이’
20170622
경찰이 영남일보 방수복 기자를 구타하는 사건이 일어나자 대구신문기자회는 테러행위와 다를 바 없다며 항의문을 전달하는 등 강하게 반발했다.(영남일보 1947년 3월28일자)

1947년 3월25일 한밤중, 대구의 극장 만경관 앞. 한 남성이 집으로 가기 위해 종종걸음을 치는데 그 앞을 3명이 막아섰다. 그들은 통행금지 시간에 돌아다닌다며 남성에게 시비를 걸었다. 남성의 얼굴은 술기운으로 볼그레했지만 취하지는 않은 듯했다. 남성은 야간통행증을 보여주며 가던 길을 재촉했다. 하지만 술집에서부터 뒤쫓아 온 그들은 건방지다며 다짜고짜 주먹을 휘둘렀다. 그들은 경찰이었다. 경찰에게 맞은 남성은 영남일보 방수복 기자였다.

경찰의 폭행사건이 알려지자 기자들은 발끈했다. 당시는 정치적 대립이 격화된 시기로 테러가 잦았다. 기자들 사이에는 경찰이 방조하고 일단의 백색테러단이 활개를 치는 시국에 대한 비판적 시각이 널리 퍼져 있었다. 그런 시기에 언론사 테러와 엇비슷한 경찰의 기자 폭행까지 일어났으니 불에 기름을 부은 격이 됐다. 대구신문기자회는 곧바로 5관구경찰청(경북경찰청)에 항의문을 전달하고 출입을 중단했다.

‘언론사 테러 방불’기자들 발끈
경찰청에 항의문…출입 중단
‘폭행과 난타사건’연일 보도한
부녀일보 편집국장 보복 구속
여론반발 커지자 警 유감 표명


‘… 지난 3월25일 경찰관 3명이 방 기자를 구타하여 상처를 내었고 의복을 파열케 한 사실에 대하여 우리 기자회로서는 실로 놀라지 않을 수 없으며 이런 경관이 경찰 내부에 존재하여 있음으로 경찰의 비행이 폭로되는 것을 볼 수 있으며 민주경찰의 위신을 떨어뜨리는 일이 적지 않다고 믿는 바입니다. … 3명의 경찰관을 즉시 파면할 것은 물론 해당 죄명에 비춰 엄중히 처벌할 것을 요구하는 바입니다.’(영남일보 1947년 3월28일자)

기자회는 언론을 공권력으로 통제하던 일제강점기의 경찰 잔재를 떠올렸다. 특히 경찰의 기자 구타가 테러행위와 다를 바 없다고 봤다. 부녀일보가 ‘돌연 테러단과 동일한 경관 3명이 영남일보 기자에 가진 폭행과 난타’ 등의 제목으로 28일과 29일 잇따라 보도를 한 이유다. 정작 영남일보보다 부녀일보가 발벗고 나섰다. 경찰은 부녀일보 편집국장 최석채를 경북경찰청에 구속하는 것으로 보복했다. 경찰의 영남일보 기자 구타사건 보도로 부녀일보 편집국장이 구속된 것이다.

20170622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애초 경북경찰청장은 경찰의 기자 구타를 엉너리로 슬쩍 속여 사건을 끝내려 했다. 기자들의 경찰 파면 요구를 정직으로 어물쩍 넘기는 대신 방 기자의 공무집행방해와 신문들의 과장보도를 물고 늘어졌다. 게다가 기자들의 야간통행증마저 회수해 버렸다. 하지만 이 같은 경찰의 막무가내식 대응은 결국 여론의 반발에 부딪쳤다. 일제 때 완장 찬 경찰의 습성을 알고 있는 부민들이 고개를 돌렸다. 결국 방 기자는 4월11일 풀려났고, 사흘 뒤 최석채도 석방됐다.

‘신문, 신문인 습격은 부정, 붓(筆)은 칼보다 무섭다, 싸우려거든 붓과 활자로 응대’하라. 아데어(Adair) 경북도지사 고문이 경찰에 대놓고 한 이야기다. 속내야 어떻든 기자 폭행에 대한 경찰청장의 유감 표명으로 기세등등하던 ‘민중의 몽둥이’는 한풀 꺾였다. 그 뒤 손에 쥔 권력을 스스로 통제하며 ‘민중의 지팡이’로 돌아왔을까. 차라리 나무에 올라 물고기를 구하고 말지. 톡톡지역문화연구소장/언론학 박사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위원회의 지원을 받았습니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기획/특집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