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성] 막걸리 소통

  • 배재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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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15   |  발행일 2017-06-15 제31면   |  수정 2017-06-15

‘조선 중엽에 막걸리를 좋아하는 이씨 성의 판서 한 분이 있었다. 좋은 소주와 약주가 있는데 하필이면 일꾼이나 마시는 막걸리만 드시느냐고 자제들이 탓하자 아무 말 않고 소의 쓸개주머니 세 개를 구해오라고 했다. 그 빈 쓸개주머니 하나에 소주를, 다른 하나에는 약주를, 또 다른 하나에는 막걸리를 담아 며칠 후 열어보니 소주쓸개는 여기저기 구멍이 나 있고, 약주쓸개는 상해서 얇아져 있었으며, 막걸리쓸개는 오히려 두꺼워져 있었다.’ 작고한 언론인 이규태씨의 글에 나오는 이야기다. 주당들의 막걸리 예찬론에 곧잘 인용된다.

막걸리는 오랜 역사만큼이나 명칭도 다양해 열가지가 넘는다. 곡주(穀酒)·백주(白酒)·농주(農酒)·탁주(濁酒)·박주(薄酒)·가주(家酒) 등으로 불린다. 서민들 사이에서는 대포·왕대포·탁배기로 통한다. 조선시대 왕 중에는 강화도령 철종과 연산군이 유난히 막걸리를 즐겼다. 왕이 된 철종이 막걸리를 찾자 중전이 친정집 노비를 시켜 구해다 바쳤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철종은 한양의 종로 이문안 막걸리를 특히 좋아해 술집 주인에게 1년에 1천석씩 급료가 지급되는 선혜청 고지기 벼슬을 내렸을 정도다. 연산군도 막걸리 애호가였다. 연산군일기에는 그가 1504년 1월에 지은 막걸리 찬가가 남아 있다. ‘참새는 가지를 다투다가 떨어지고/ 나는 벌레는 정원에 가득히 노니고 있네/ 막걸리야 너를 누가 만들었더냐/ 한 잔으로 천 가지 근심을 잊어버리네’라고 읊었다.

이낙연 국무총리도 자타가 공인하는 막걸리 마니아다. 그는 막걸리의 매력으로 3가지를 꼽는다. 많이 마시지 않아도 배 부르고, 배 불러 2차를 가지 않아도 되고, 소주·폭탄주를 마시고 싸우는 경우는 봤어도 막걸리 마시고 싸우는 경우는 거의 못 봤다는 것이다. 흔히 술자리에서 회자되는 막걸리 오덕(五德)과 상통하는 얘기다. 이 총리는 후보자로 지명된 뒤 “막걸리라도 마셔가면서 야당 정치인과 틈나는 대로 소통하겠다. 역사상 가장 막걸리를 많이 소모하는 총리공관을 만들겠다”며 막걸리 소통을 공언했다.

이 총리의 다짐과 달리 문재인 대통령이 국회 인사청문보고서 채택이 무산된 김상조 공정거래위원장 임명을 밀어붙이면서 정국이 얼어붙고 있다. 추경과 정부조직법 개정을 두고도 여야의 기 싸움이 치열하다. 새 정부 출범 초기에 약속했던 협치도 가물가물하다. 여야가 청와대에서 대폿잔을 기울이며 막걸리 소통이라도 해야 할 판이다. 배재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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