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산책] 예술에 취하다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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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15 07:50  |  수정 2017-06-15 08:56  |  발행일 2017-06-15 제21면
20170615
김향금 <대구현대미술가협회장>

얼마 전 대구시립미술관에서 석재 서병오 작품전이 열렸다. 미술관에서는 흔치 않은 전시였기에 미술인들에게 준 감회도 남달랐을 것이다. 시·서·화에 모두 능했던 석재 선생이 문인화에 대한 공로가 컸다는 것은 익히 들었지만, 실제 작품을 처음 접해보는 기회라 몇 차례 전시를 가보았다. 그의 특출한 소재와 화법, 기개가 느껴지는 화려함이 있었다. 먹을 틀고 앉아 풀어내고 있구나 생각했다. 그의 먹은 오묘하고 아름다웠다. 그저 화가로서 동하고 이해하는 수준에서 작품을 보는 데도 감동이 벅차기는 했지만, 알 수 없는 서운함과 아쉬움이 교차하기도 했다.

한국미술사를 공부하지 않은 필자가 어찌 석재를 논하겠냐마는 서예나 문인화도 조형언어이기 때문에 익히지 않아도 느낄 수는 있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그도 그저 소견일 뿐이다. 미술관에서 열린 문인화전이 귀하듯이 우리에게는 우리 미술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는 교육적 토대와 안목을 가질 만한 기회가 없었다. 그럼에도 내 안에서는 예인의 흥취, 붓과 먹이 풀어내는 세상에 대한 감흥이 함께했기에 가슴이 울렁거리다가 벅차오르기도 했다.

내가 어릴 적만 해도 학교가 아니더라도 일상에서 예술을 느낄 수 있는 기회가 있었다. 아버지는 내게 가끔씩 먹을 갈게 했다. 물을 길어다가 다소곳하게 먹을 갈고 있노라면, 거실에서 무르익고 있던 대화가 내게 드문드문 들렸다. 아버지께서는 졸음을 깨우려는 듯이 헛기침을 하시고는 큰방으로 손님과 함께 들어오셨다. 손님은 어린 내가 보아도 분명 큰스님이셨기에 나는 저린 발을 붙잡고 일어나 예를 갖추곤 했다. 방에 들어오셔도 한참을 나누던 이야기에 깜박 취할 때가 되면 이내 큰스님이 붓을 잡으셨다. 한 번 시작하면 두어 시간은 하셨기에 나는 꼼짝없이 먹 가는 일에 붙들렸다. 시간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긴장감과 붓이 노는 모양에 빠져서 같이 신이 나기도 했던 기억이 있다.

나는 가끔씩 들리던 아버지와 손님들의 들뜬 정취가 그리워서 아직도 그때의 큰 벼루와 습작 화선지 뭉치를 간직하고 있다. 정규 미술교육을 통하여 받을 수 없었던 그 귀한 교육을 아버지가 해주셨던 것을 기억하고 있다. 서양미술을 먼저 배우고, 한국화가 사라지고 있는 우리의 현실이 아쉽다. 예술에 취하고 삶의 신념과 서러움마저 서원한 선이 되고 점이 되었을 그들의 세계가 무작정 그리운 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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