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칠곡군 약목면 남계리

  • 인터넷뉴스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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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09   |  발행일 2017-06-09 제36면   |  수정 2017-06-09
사라진 집과 부서진 담도 그림이 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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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계리 벽화마을. 소박하고 친근한 주제의 그림들이 정성스레 그려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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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성교 앞 골목길에 들어서면 벽화골목의 구심점이라 할 수 있는 남계2리 마을회관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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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천 상류의 두만지. 1970년대 초에 축조되었다. 저수지 상류 계곡은 훌륭한 피서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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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만지 바로 아래에 위치한 신유장군유적지.

왜관 나들목을 나가 낙동강을 건너자 정신이 없다. 길지도 않은 공사장이 난데없는 급류처럼 혼을 빼놓는다. 왜관과 구미를 잇는 4번 국도. 기억에 길은 느슨했고 마음은 나슨했고 강 건너 경부고속도로와 67번 강변도로의 속도를 흘깃 바라보며 씨익 흡족했었다. 공사 구간이 끝나자 넓고 날쌘 길이다. 이 길이 이렇게나 넓었었나. 이렇게나 트럭이 많았나. 아, 구미공단이 가깝구나. 아, 약목역에 대규모 컨테이너 야적장이 있댔지. 그러고 보니 참 오랜만이구나, 이 길.

두만천의 남쪽에 있다는 뜻의 ‘南溪里’
2010·2011년 남계2리 2.5㎞ 벽화 조성
골목 담벼락마다 소박·친근한 그림들

탑걸·두만리·상로전·여래실 등 地名
고려 때 사찰 많았던 마을 유래 보여줘
두만지 앞엔 조선시대 武將 신유 사당


◆남계리 벽화골목

약목면 표지석을 따라 좁은 도로로 빠져 나간다. 좁고 한적한 길에 심박동이 느려진다. 왼쪽으로 저수지 둑의 파란색이 싱그럽다. 일제 강점기에 축조되었다는 남계지(南溪池)다. 잠시 후 남계교 입구에서 좌회전해 들어간다. 키 큰 풀과 노란 꽃들이 무성한 두만천(豆滿川)가에 내려선다. 햇빛 내리는 소리가 들릴 것 같은 마을, 남계리다.

남계리는 비룡산 아래의 평지마을로 논밭이 비교적 넓은 농촌이다. 비룡산 북쪽계곡에서 시작된 두만천이 약목면의 가운데를 흘러 면의 북쪽에서 경호천과 만나 낙동강으로 가는데, 남계리는 그 두만천의 남쪽에 있다는 의미다. 농지가 넓고 천이 흐르고 남계지 외에도 저수지가 3개나 더 있는 마을이다. 언뜻 고만고만한 풍요를 누리는 따뜻한 평화가 떠오른다.

남계교에서 몇m 상류, 복성교 앞 골목 벽에 마을 지도가 그려져 있다. 노랑은 남계1길, 분홍은 남계2길, 초록은 남계6길, 연파랑은 남계8길. 이곳은 남계리 벽화골목이다. 2010년 가을과 겨울, 2011년 가을과 겨울 동안 남계리의 중심인 남계2리에 2.5㎞의 벽화길을 만들었다. 몇 년이 지나는 동안 색은 조금 바랬어도 그림은 자못 산뜻하다.

뜨거운 햇볕을 정수리에 고스란히 받으며 골목을 느적느적 걷는다. 이따금 좁은 벽 그늘에 바짝 붙어 그림인 체 쉰다. 그림은 십장생도, 풍속화, 우시장, 장터 풍경, 고양이, 꽃, 채소, 아이들, 만화 캐릭터 등 소박하고 친근한 것들이다. 수수하지만 하나하나 정성을 들인 흔적이 보인다. 그러나 더러는 무너져 깨어진 그림도 있고, 아예 사라진 것도 있다.

담장은 높다. 허물어지거나 기울어진 담장이 있고, 흙돌담도 남아 있고, 금이 간 시멘트 벽 너머로 낡아 바스라질 것 같은 슬레이트지붕과 벌겋게 드러난 서까래가 보이기도 한다. 거개 집들은 낮지만 번듯한 이층 양옥도 있다. 일터로 갔나, 이른 밭일 마치고 휴식에 들었나. 골목길에선 누구도 마주치지 않았다. 라디오 소리도, 텔레비전 소리도, 말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높은 담장 속 보이지 않은 개들이 내 걸음에 두어 번 사납게 짖었고, 골목에는 먼지 하나 없었다. 미화된 세계의 경직성이 나를 내모는 듯했다.

◆역사 깊은 남계리

남계리는 고려 때 사찰이 많았던 마을이라 한다. 남계1리에는 탑이 있었다는 탑걸과 중탑걸이라는 지명이 남아 있고, 남계3리에는 두만사라는 절이 있었다는 두만리와 사찰들의 큰 법당인 상로전이 있었다는 상동골 등의 이름이 남아 있다. 남계2리는 여래실과 해방촌 두 개의 자연부락으로 이루어져 있다. 여래실은 옛날 마을에 절터와 석가여래상이 있었다고 해서 생긴 이름이다. 해방촌은 광복 후에 생긴 마을로 복성교 상류의 다리 이름이 해방교다.

조선시대 남계리에서는 신유(申瀏) 장군이 태어났다. 효종 9년인 1658년 청나라의 요청을 받아 조총군(鳥銃軍) 200여 명과 나선정벌(羅禪征伐)에 참여해 큰 공을 세운 인물이다. 그가 원정(遠征)의 전말(顚末)을 기록한 ‘북정일기(北征日記)’는 북방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로 여겨진다.

두만천 최상류 부근의 두만지 앞에 신유 장군의 사당이 있다. 비각에는 두 개의 신도비가 서 있는데 하나는 6·25전쟁으로 파손된 채다. 근대의 인물로는 신유 장군의 후손인 신현확이 있다. 1920년 남계리에서 태어났고 제13대 국무총리였으며, 정계은퇴 이후 삼성물산 회장을 지낸 분이다. 지금 사당은 조용하고, 나무 그늘에는 오수를 즐기는 이와 두런두런 낮은 음성으로 이야기를 나누는 이들이 있다. 별나게도 사당 아래에는 복성리 출신이자 신숭겸 장군의 후손인 가수 신유의 노래비가 있다.

천 따라 내려오며 멀리 복성교 앞에 적벽돌로 조적된 커다란 창고를 본다. 골목길에서는 하늘 볼 일 없어 미처 알아채지 못했다. 아마 남계리에서 제일 높고 제일 큰 건물일 것이다. 부서진 모서리 하나 없이 번듯하게 서 있는 건물은 얼핏 적산창고로 보인다. 면사무소에서도, 남계리 이장님도, 이 건물에 대해 알지 못했다. 100년 넘은 약목교회가 6·25전쟁으로 예배당을 잃었을 때 ‘남계리 적산창고’에서 임시로 예배를 드렸다는 기록이 있다. 교회에 물어보니 이 건물이 그 창고가 맞을 거라 한다. 왜 모를까, 이리 큰 것을. 아, 나도 몰랐네.

◆숲 대신 컨테이너, 약목

두만천 너머 남계리 북쪽은 약목면사무소가 있는 복성리다. 점포들 늘어선 복성리 도로를 지나 다시 4번 국도로 향한다. 약목 시장을 지난다. 3, 8일마다 열리는 약목장은 100년이 넘었다. 예전에는 구미, 성주, 왜관, 석적 등지에서 생필품을 구하러 오는 이들의 긴 행렬이 이어졌고 우시장이 성했으며 80년대 후반까지 밤늦도록 붉은 불 밝혔던 장이다. 장날이 아니어서인지 장터는 휑하다.

끝이 국도에 닿자 약목역이 눈앞이다. 약목에 역이 들어선 것은 일제 강점기인 1918년. 2000년에 새로 지었다는 역사는 투박한 모습이다. 왜관과 구미를 잇는 교통의 요충이었던 약목은 6·25전쟁 당시 인근 다부동 전투의 전화가 크게 미친 곳이기도 하다. 역사 좌우로 색색의 컨테이너들이 빼곡하다. 약목(若木)은 조선시대 숲이 무성해 생긴 이름이다. 내게 약목이란 느린 기차 안에서 읊조렸던 이름, 내 후두가 기억하는 음이었다. 이제 약목은, 컨테이너와 남계리의 정적으로 기억될 것 같다. 트럭이 쌩 지나가고, 조심스레 국도에 오른다. 낙동강변에 펼쳐진 칠곡군 제일의 약목평야를 보다, 다시 급류에 휘말린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경부고속도로 왜관IC로 나가 4번 국도를 타고 제2 왜관교 지나 구미방향으로 간다. 칠곡경찰서 지나 조금 더 가다 남계삼거리 왼쪽 길로 들어가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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