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8] 흩날리는 꽃잎에 속절없이 한이 쌓이고- 허균과 이매창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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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6-01   |  발행일 2017-06-01 제22면   |  수정 2017-06-01
이매창 세상 등지자 ‘정신적 연인’ 허균은 구구절절 눈물의 ‘애계랑’ 글
밤비에 새잎 나거든
20170601
관동지방의 대표적 누각인 삼척 죽서루. 삼척부사를 지낸 허균은 이 누각에 수시로 올라 풍류를 즐기곤 했다.

‘흩날리는 꽃잎에 속절없이 한이 쌓이고/ 시든 난초에 다만 마음이 상할 뿐이네/ 봉래섬 구름도 자취가 사라지고/ 푸른 바다에 달도 이미 잠기었구나’ 시인이자 기생인 이매창이 죽자 허균(1569~1618)이 그녀를 기려 지은 시 중 일부다. 그리 길지 않은 인생을 산 매창이 진정한 사랑을 주고받은 주인공은 유희경이지만, 매창은 또한 허균이 정신적 연인으로 삼았던 주인공이기도 했다. 허균에게 있어 매창은 각별한 의미를 지닌 여인이었다.

허균·매창 전라 부안서 첫 만남
온종일 술마시고 詩 읊으며 화답
선 넘지 않으며 정신적 연인으로
매창이 죽을때까지 사귐 이어져


◆처음 만나 종일 술 마시며 시를 주고받으니

허균과 매창의 첫 만남은 허균의 나이가 서른셋, 매창의 나이는 스물아홉이던 1601년 7월이었다. 허균이 전라도의 세금을 거두어들이는 전운판관(轉運判官)으로 갔을 때 일이다. 허균은 그즈음의 일기를 ‘조관기행(漕官紀行)’에 자세히 썼는데, 매창과 만난 일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임자(壬子)일 부안에 도착했다. 비가 몹시 내려 집안에 머물렀다. 고홍달(高弘達)이 인사를 왔다. 창기(倡妓) 계생(桂生)은 이옥여(李玉汝: 옥여는 이귀의 자)의 정인(情人)이다. 거문고를 뜯으며 시를 읊었다. 비록 생김새는 드날릴 정도는 아니었지만, 재주와 정감이 있어 함께 이야기할 만하였다. 하루 종일 술을 마시고 시를 읊으며 서로 화답하였다. 밤에는 자기 조카딸을 침실로 들였는데 곤란한 일을 피하기 위해서였다.’

매창이 유희경을 가슴에 품고 수절하고 있었거나 이귀(1557~1633)의 정인이었기 때문에 허균이 피한 듯하다. 서로 유혹을 느낀 데다 매창은 기생이었기에 잠자리를 같이할 수 있었지만, 그들은 결국 서로 선을 넘어가지 않았다. 허균과 매창의 이 같은 사귐은 그녀가 38세로 죽을 때까지 이어졌다.

허균과 매창이 다시 만난 것은 1608년이다. 선조가 죽고 광해군이 왕위에 오르자 허균은 공주목사 자리에서 파면당하고 부안을 찾았다. 그는 매창과 해안(海眼)이라는 승려와 더불어 주변 여러 절경을 찾아다니며 시를 짓고 노래를 부르고 술 마시는 풍류 속에서 울분을 삭였다. 허균은 이때 매창에게 불법(佛法)의 진리와 참선을 가르쳐 주기도 했다.

허균은 당시 이단으로 지목되던 불교와 도교는 물론 서학(西學)에도 깊은 관심을 가졌다. 매창은 이런 허균의 영향을 받았다. 허균의 문집 ‘성소부부고’에 허균이 매창에게 보낸 2통의 편지가 남아있다. 둘 다 시기는 1609년 1월과 9월로 되어 있다. 허균은 그해 1월에 중국 사신의 일행으로 뽑혀서 중국에 다녀왔고, 홍문관 월과(月課)에서 잇따라 세 번 일등을 하며 결국 광해군의 눈에 들어 9월에는 형조참의로 급속 승진을 했다.

허균의 편지에는 매창을 향한 애정이 넘친다. 1609년 1월, 계랑(桂娘: 매창)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다.

‘그대가 보름달을 바라보면서 거문고를 타며 산자고를 읊었다는데, 왜 한가하고 은밀한 곳에서 하지 않고 바로 윤 부윤의 비석 앞에서 불러 남의 허물을 잡는 사람에게 들키고, 3척의 거사비(去思碑)를 시로 더럽히게 하였는가. 이것은 그대의 잘못인데, 비방이 내게로 돌아오니 억울하오. 요즘도 참선을 하시는가? 그리운 정이 간절하구려.’

‘산자고’에서 ‘자고’는 꿩과의 새로 메추리와 비슷하게 생겼는데, ‘산자고’는 산에 사는 자고새에 빗대어 무엇을 표현한 노래인 듯하다. 거사비는 감사나 수령이 소임을 마치고 떠난 뒤에 그 선정(善政)을 기려 백성들이 세운 비를 말한다.

이 내용에는 사연이 있다. 매창과 가깝게 지낸 고을 원님이 있었는데, 그 사람이 떠나간 뒤 고을 사람들은 그를 위해 비석을 세워주었다. 그런데 어느 날 밤 매창이 그 비석 옆에서 ‘산자고’ 노래를 불렀다. 그것이 누구를 향한 노래였는지는 확실치 않다. 하여간 그래서 ‘매창이 눈물을 흘리며 허균을 원망하였다’는 소문이 났고, 허균의 친구(이원형)는 그것을 주제로 시까지 지었다. 그래서 허균은 곤란해졌고, 이 편지를 보내게 된 것이었다.

1609년 9월 매창에게 보낸 두 번째 편지는 허균과 매창의 관계를 명확하게 보여주고 있다.

‘봉래산(蓬萊山)의 가을이 한창 무르익었으리니, 돌아가고픈 생각이 가득가득 난다오. 그대는 틀림없이 성성옹(惺惺翁: 허균 자신을 가리킴)이 시골로 돌아오겠다는 약속을 어겼다고 웃을 거요. 그때에 만약 생각을 한번 잘못 먹었더라면 나와 그대의 사귐이 어떻게 10년 동안이나 그토록 돈독할 수가 있었겠소. 이제 와서야 진회해(秦淮海)는 진정한 사내가 아니고 망상을 끊는 것이 몸과 마음에 유익한 줄을 알았을 것이오. 어느 때나 만나서 하고픈 말을 다할는지 편지 종이를 대하니 마음이 서글프오.’

이 글에 나오는 진회해(1049~1100)는 어려서부터 문재(文才)가 뛰어났던 북송대의 시인이다. 이름은 진관(秦觀)이고, 회해는 호다. 남녀의 사랑을 묘사한 시와 신세를 한탄하는 시를 많이 남겼다. 시들은 수려하고 함축미가 넘치며, 비교적 부드러운 편이다. 여기서 진회해는 풍류객의 대명사로 쓰인 듯하다.



◆매창은 죽고

그런데 아쉽게도 이듬해에 매창이 죽는다. 그 소식을 들은 허균은 눈물을 흘리며 매창을 기리는 글 ‘애계랑(哀桂娘)’을 지었다. 시 2수가 포함돼 있다.

‘계생(桂生)은 부안 기생이다. 시에 능하고 글도 알았으며 또 노래와 거문고도 잘했다. 천성이 고고하고 깨끗하여 음탕한 것을 좋아하지 않았다. 내가 그 재주를 사랑하여 교분이 막역하였으며, 비록 우스갯소리를 나누며 가까이 지냈지만 어지러운 지경에까지는 이르지 않았으므로, 그 사귐이 오래가도 변하지 않았다. 지금 그녀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그를 위해 한 차례 울고 난 후 율시 2수를 지어 그를 슬퍼한다.

절묘한 글귀는 넓게 펼쳐진 비단이요(妙句堪擒錦)/ 맑은 노래는 흩어지고 머무는 구름이라(淸歌解駐雲)/ 복숭아를 훔친 죄로 하계에 귀양 와서(偸桃來下界)/ 선약을 훔쳐 인간세상을 떠나셨네(竊藥去人群)/ 부용꽃 휘장에 등불은 어두워졌는데(燈暗芙蓉帳)/ 비취색 치마에 향내는 아직도 남아있구려(香殘翡翠裙)/ 내년에 복사꽃 활짝 피어날 때엔(明年小桃發)/ 그 누가 설도의 무덤을 찾아주리오(誰過薛濤墳)// 처절하구나 반첩여의 부채여(凄絶班姬扇)/ 서글프구나 탁문군의 거문고여(悲凉卓女琴)/ 흩날리는 꽃잎에 속절없이 한이 쌓이고(飄花空積恨)/ 시든 난초에 다만 마음이 상할 뿐이네(衰蕙只傷心)/ 봉래섬 구름도 자취가 사라지고(蓬島雲無迹)/ 푸른 바다에 달도 이미 잠기었구나(滄溟月已沈)/ 앞으로는 봄이 와도 소소의 집에는(他年蘇小宅)/ 앙상한 버들 그늘을 이루지 못하겠구려(殘柳不成陰)’

구구절절이 안타까움이 묻어나는 시다. 8년 후에 허균은 반역죄로 처형당한다.

‘설도(薛濤)’는 당나라 중기의 명기(名妓)다. 음률과 시사(詩詞)에 능하여 유명한 시인들과 사귀었다. 여기서는 계생을 일컫는다. ‘반첩여’는 한나라 성제 때의 후궁이다. 성제의 총애를 받았는데, 자태가 뛰어나고 노래와 춤에 능한 조비연(趙飛燕)에게로 성제의 총애가 옮겨가고 또 무고를 당하자 스스로 장신궁(長信宮)으로 물러가 태후를 모시며 지냈다. 이때 자신의 신세를 소용이 없어진 가을부채에 비유해서 ‘원가행(怨歌行)’을 지었다.

‘탁문군(卓文君)’은 한나라 촉군(蜀郡)의 부자 탁왕손(卓王孫)의 딸 이름이다. 과부로 있을 때 사마상여의 거문고 소리에 반해서 그의 아내가 되었다. ‘소소(蘇小)’는 남제(南齊) 때 전당(錢塘)의 기생 이름이다. 흔히 기생의 범칭으로 쓰인다.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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