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인물 - 이 세계] 들꽃에 빠진 김영규 한국전력기술 부장

  • 박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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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5-20 07:29  |  수정 2017-05-20 07:29  |  발행일 2017-05-20 제8면
전력기술 엔지니어, 야생화에서 性的 아름다움을 발견하다
<이 사람이 사는 세계>
직장생활 권태기에 야생화 만나
약용식물관리사 등 자격증 보유
회사업무 외 대부분 들꽃과 보내
식물 섭취 통한 약리에도 관심
[토요인물 - 이 세계] 들꽃에 빠진 김영규 한국전력기술 부장


그대 만약 스스로/ 조그만 사람 가난한 사람이라 생각한다면/ 풀밭에 나아가 풀꽃을 만나 보시라

그대 만약 스스로/ 인생의 실패자, 낙오자라 여겨진다면/ 풀꽃과 눈을 포개보시라

풀꽃이 그대를 향해 웃어줄 것이다/ 조금씩 풀꽃의 웃음과/ 풀꽃의 생각이 그대 것으로 바뀔 것이다

그대 부디 지금, 인생한테/ 휴가를 얻어 들판에서 풀꽃과/ 즐겁게 놀고 있는 중이라 생각해 보시라

그대의 인생도 천천히/ 아름다운 인생 향기로운 인생으로/ 바뀌게 됨을 알게 될 것이다. <나태주 시 ‘풀꽃과 놀다’에서>

한국전력기술 품질안전환경처 김영규 부장(54)은 회사에선 선임 감사자, 사업관리 전문가, 품질관리 기사, 건설관리 특급기술자 등의 자격증을 가진 전력 분야 베테랑 엔지니어이지만 밖에서는 들꽃 연구가로 통한다. 식물의 생태·생리 연구, 들꽃 사진찍기, 들꽃 사진치료 등의 분야에서 전문성을 인정받고 있으며 들꽃·숲·나무에 대한 강의도 하고 있다.

산림치유지도사(1급), 숲생태안내자(숲해설사), 야생화전문가, 약용식물관리사, 사진치료사(심리상담사) 등의 자격증에서 보듯 그는 회사 업무를 제외한 일상의 대부분을 들꽃과 숲 연구에 보내고 있다. 국내 자생 식물의 30% 정도는 열매만 봐도 이름과 종류를 알아 맞히고, 싹을 보면 거의 전부를 알 수 있을 만큼 들꽃(풀)과 관련해서는 통달의 경지에 이르렀다. 평범한 엔지니어가 어떻게 들꽃 연구가가 됐을까.

[토요인물 - 이 세계] 들꽃에 빠진 김영규 한국전력기술 부장
김영규 한국전력기술 부장이 회사에 조성된 야생화밭에서 포즈를 취하고 있다. 작은 사진은 김 부장이 전국을 탐사하며 촬영한 들꽃. (①구미 금오산의 ‘금오족도리풀’. ② 김천·구미에 자생하는 희귀종 ‘끈끈이장구채’. ③ 김천 황악산의 ‘나도옥잠’. ④ 김천 황악산에 자생하는 ‘뻐꾹나리’.)

#1. 권태&만남= 그와 들꽃의 만남은 1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40대 초반 그는 돌연 직장생활 ‘권태기’를 맞는다. 젊음을 송두리째 바친 회사였지만 느닷없는 권태감과 무력감은 감당할 수 없는 무게로 압박해 왔다. 회사를 그만두고 귀농을 결심하는 단계에까지 이르게 됐다. 그는 시골에 농지를 장만하고, 과일나무도 심는 등 귀농 준비에 들어갔다.

들꽃은 이즈음 만났다. 하지만 처음부터 반가웠던 건 아니었다. 과일나무 가꾸기에 나섰다가 과수원을 온통 뒤덮고 있는 들풀로 골머리를 앓았기 때문이다. 엔지니어답게 들풀을 효과적으로 제거할 방법을 궁리했다. 시간만 나면 자료를 보거나 들풀을 살펴보면서 효과적인 제초 방법을 연구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제거하려 하면 할수록 들꽃에 점점 빠져드는 자신을 느꼈다. 들꽃에 빠져들수록 회사에 대한 권태감도 옅어졌다. 결국 정년퇴직 이후로 귀농을 미루기로 한다. 여기까지 2년6개월이 걸렸다.

#2. 몰입&희열= 10년을 훌쩍 넘긴 김 부장의 들꽃탐사는 ‘아름다운 생명’을 찾기 위한 여정이었다. 들꽃 탐사영역은 제주도에서 휴전선 부근까지 전국을 아우르고 있다. 이처럼 광범위한 탐사활동의 결과는 50여만장의 사진으로 남았다. 사진은 그가 들꽃 및 숲 강의, 사진치료, 산림치유, 숲생태 안내, 약용식물 관리 등의 분야에서 전문가로 활동하는 데 훌륭한 교재가 되고 있다.

“식물은 기후변화를 가장 먼저 알려주는 전령입니다. 근래 들어 가장 뚜렷한 변화는 제주도에서 자생하던 식물의 육지 상륙이죠. ‘등심불꽃’이 대구까지, ‘육계나무’가 전북까지 올라오는 등의 변화는 한반도가 아열대기후 영역에 들었음을 나타내는 현상입니다.”

그는 이 같은 식물의 ‘이동’을 치열한 생존 투쟁의 산물로 봤다. 그리고 들꽃의 삶은 인생과 닮았다고 했다.

“들꽃의 궁극적 의미는 ‘아름다움’입니다. 그것도 성적(性的) 아름다움에서 비롯된 치명적인 아름다움이죠. 꽃은 식물의 종족번식을 위한 생식기관입니다. 야생에서 온갖 어려움을 극복하며 피운 꽃을 통해 느끼는 아름다움은 생명의 경이로움과 닿아 있습니다.”

그는 들꽃에 몰입한 사람만이 들꽃마다 내뿜는 독특한 매력과 아름다움을 느낄 수 있다고 귀띔했다. 그는 그것을 ‘희열’이라고 했다.

#3. 약식&동원= 이렇게 그가 들꽃사랑을 통해 축적한 지식은 한국전력기술에 ‘약식동원(藥食同源)’이라는 동호인 모임이 만들어지게 된 배경이 됐다. 이 회사는 컴퓨터를 이용한 두뇌노동이 주를 이루는 업무 특성상 사원의 세심한 건강관리가 필요했다. 김 부장의 내공은 자연스럽게 발산됐다. 동호인과 틈틈이 들과 산으로 나가 들꽃을 살피며, 특성과 효능을 검증된 사실에 근거해 알려주곤 했다.

김 부장은 동호인 모임에서 “‘약과 음식은 동일’한 것이며 음식의 근원은 식물(풀)이다. 이는 우리가 식사만 제대로(몸과 나이에 맞춰) 해도, 특별한 약을 먹지 않아도 건강할 수 있다는 뜻”이라며 “약은 상실된 인체기능을 회복하기 위한 것이지만, 복용이 습관화되면 오히려 정상적인 인체기능을 방해한다”고 강조했다.

10년 들꽃탐사를 통해 그는 ‘식물의 생육기간과 수명은 약의 효과(藥效)와 관련이 있고, 식물의 생태는 약리(藥理)와 관련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가령 채소나 과일을 건강식으로 섭취할 경우 그 채소나 과일의 생장 기간만큼은 섭취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자연의 시계는 건강의 기준입니다. 건강한 흙에 뿌리를 두고, 햇빛·바람·비·눈 등에 노출된 환경에서 자연의 속도로 자란 식물이 최고의 음식입니다.”

#4. 대구&경북= 2년 남짓한 김천생활 동안 그는 금오산을 동·서·남·북으로 오르내리며 ‘금오산 사계(四季)’를 탐색했다. 대구·경북의 산과 들에 자생하는 들풀을 찾아다닌 그는 대구·경북 들꽃이 중부와 남부 지방의 식생을 모두 갖고 있다고 설명했다. 특히 최근 발견된 팔공산의 ‘복수초’ 군락, 김천·구미지역 들판에 자생하는 ‘끈끈이장구채’, 김천 황악산 자락의 ‘뻐꾹나리’, 금오산의 ‘금오족도리풀’ 등을 특색 있는 들풀로 꼽았다.

김 부장은 “김천에서 상주를 지나 소백산에 이르는 백두대간은 멋진 들풀을 만날 수 있는 곳이며, 대구 팔공산과 비슬산은 복수초·진달래 군락 외에도 수많은 들꽃이 산재해 산의 매력을 더해주는 곳”이라고 말했다.

글·사진=김천 박현주기자 hjpark@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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