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대통령선거 패자의 공통된 특징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05-13   |  발행일 2017-05-13 제23면   |  수정 2017-05-13
[토요단상] 대통령선거 패자의 공통된 특징
최병묵 정치평론가

2002년 11월 말. 대통령선거를 20일 정도 남기고 이회창 한나라당 대통령후보의 핵심 참모가 후보에게 보고했다.

“지금 조사에선 5~7%포인트 차이로 밀리지만, 우리에겐 숨어있는 5%가 있습니다.”

노무현 새천년민주당 후보와 정몽준 국민통합21 후보 간 단일화가 이뤄진 직후였다. 3자 대결의 대선구도가 돌연 양자구도로 바뀌면서 이회창 후보가 열세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시점에 핵심 참모들의 이런 보고가 잇따랐다. 12월 초부터는 언론에서도 ‘숨어있는 5%’를 공식 거론하기 시작했다. 작년 말 트럼프 미국 대통령과 힐러리 클린턴 민주당 후보의 경쟁에서 존재를 확인했다는 ‘샤이(shy) 보수’의 원조 격이 우리나라에서 먼저 있었던 셈이다.

실제 개표 결과는 어땠을까. 노무현 48.91%, 이회창 46.58%로 2.33%포인트 차였다. 선거운동 기간 내내 5~7%포인트 차이로 노무현 후보가 앞섰는데, 2% 남짓 승리로 끝났으니 ‘숨은 표’가 하나도 없었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물론 전적으로 결과론이지만.

2007년이나 2012년에는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았다. 보수 정당의 후보가 선거운동 기간 내내 뒤처진 적이 거의 없었던 것이 가장 큰 이유다. 굳이 표가 숨어있다며 판세를 호도하거나, 후보에게 아부하거나, 핑곗거리로 스스로를 위안할 이유가 없었던 셈이다.

박근혜 대통령 탄핵으로 치러진 이번 대선은 또다시 이 논란에 불을 붙였다. 최순실 국정농단 사건으로 박근혜정부와 자유한국당, 나아가 보수 세력에 쓰나미성 위기가 몰아닥쳤기 때문이다. 홍준표 자유한국당 후보는 지난 4일 “내 지지율이 조금만 더 올라가면 샤이 보수층의 가담으로 문재인 후보를 대역전할 것”이라고 공언했다. 안철수 국민의당 후보 역시 투표 하루 전까지도 “국민의 손으로 여론조사를 뒤엎는 기적이 일어날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러나 모두가 지켜봤듯이 ‘대역전’도 ‘기적’도 일어나지 않았다. 오히려 어느 때보다도 이번 조사의 정확도는 높았다. “응답률이 4~5%에 불과한 ARS(자동응답전화) 조사 갖고서 어떻게…” “국민의 80%는 아예 응답을 안한다고 한다”는 등으로 홍준표·안철수 후보측은 여론조사에 대한 불신을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실제 ARS조사에서 유권자의 90% 정도는 조사에 응하지 않는다. 전화면접조사에서도 70~80% 정도는 “바쁘다” 등의 이유로 전화를 끊는 것이 사실이다.

단순하게 이런 수치만 갖고 여론조사 결과가 실제 여론을 반영하지 못한다고 비판하는 것은 ‘과학’을 믿지 않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여론조사의 기법은 나날이 발전하고 있다. 조사를 거부하거나 왜곡하려는 응답자에 맞서 국민들의 속마음을 알아내려는 기술이 개발되고 있다. 그 첫 번째가 오염되지 않은 샘플(응답자)을 확보하는 것이다. 그동안 여론조사가 자주 틀렸던 것은 조사기관이 우후죽순격으로 늘어나고 경쟁이 치열하다보니 생긴 문제라고 봐야 한다. 샘플을 제대로 뽑고, 그래도 미덥지 못하면 심층조사하기도 하는 등 여러 방법이 있다. 그래서 유권자들로선 조사의 질(質)을 따져봐야 한다. 결국은 조사기관의 신뢰성 문제다.

정치부 기자를 30년 동안 한 필자는 지금도 3~4개 조사기관의 결과 외에는 믿지 않는다. 간혹 필자가 알고 있는 판세와 너무나도 다른 결과를 발표하는 곳이 있을 경우, 조사기관 대표자나 의뢰자를 취재하곤 한다. 상당수의 경우 “그러면 그렇지”라고 무릎을 칠 때가 있다. 이런 사람이나 기관의 편견(偏見)을 확인했기에 그렇다. 조선일보와 한겨레신문이 각각 의뢰한 여론조사 결과가 다른 경우가 많은 것은 이 때문이다.

그렇지만 경험칙으로 확립한 필자의 ‘믿음’이 있다. 여론조사를 불신하는 후보는 선거에서 한 번도 이긴 적이 없다는 점이다. 1997년과 2002년 이회창 후보가 그랬고, 2007년 박근혜 한나라당 경선후보 역시 그랬다. 이번 대선에서도 홍·안 후보가 문재인 대통령과 18~20%포인트 차이가 난다는 현실을 인정하고 대책을 모색했다면 어땠을까. 부질없는 상상이지만,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면 경험에서 배워야만 한다. 경험만큼 훌륭한 어머니도 없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