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6]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신재효와 진채선(下)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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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20   |  발행일 2017-04-20 제22면   |  수정 2017-04-26
낙향한 채선 판소리 그만두고 근신…스승 신재효 임종 지킨 후 행방 묘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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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가 짓고 직접 쓴 ‘도리화가’ 가사.

‘청풍명월 주장(主掌)하여 퉁소불어 즐겨하니/ 일대문장(一代文章) 만고풍류 지금까지 일렀으되/ 두 손님뿐이었지 절대가인 없었으니/ 언제나 다시 만나 소동파를 읊어볼까’.

도리화가의 마지막 부분이다. 신재효가 59세 때인 1870년 7월(음력)에 지은 작품이다. 이 노래의 ‘스물네 번 바람 불어’라는 구절을 통해 진채선은 당시 24세였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이렇게 신재효는 도리화가를 통해 자신의 제자이면서 연인의 감정을 느꼈던 진채선에 대한 애틋하고 절절한 감정을 드러냈다.

이 ‘도리화가’는 돌고 돌아 서울에 있는 진채선의 귀에까지 들어갔다. 스승을 사모하던 진채선은 그 곡조가 스승의 작품임을 단박에 알아보고, 서도 소리 ‘추풍감별곡(秋風感別曲)’으로 자신의 마음을 대변했다.

대원군이 1873년 실각해 양주에 은거하게 되자 진채선은 낙향, 스승 신재효를 찾아본 뒤 김제로 내려가 판소리를 그만두고 근신했다. 그 후 스승의 임종을 지킨 후 사라졌고, 그 뒤 행방은 알려진 바가 없다고 한다.

고창판소리박물관 이영일 학예연구사는 경복궁 낙성연 이후에 진채선이 지역 현감의 부름을 거부한 뒤 신재효에게 문제 해결을 요청한 사실을 담은 기록이 최근 발견되기도 했다며, 진채선은 경복궁 낙성연 이후에도 스승 신재효와 계속 함께 활동한 것일 수도 있다는 견해를 밝히기도 했다. 진채선은 낙향한 후 진주부사의 수청기생이 되었다는 이야기도 있다.

■ 판소리 대가 신재효
고창 향리로 지내다 연구 전념
사설 여섯마당 최초 정리·개작
독자적 이론 정립 비평가 활동
여류 唱者 교육도 선구적 역할

■ 첫 여류명창 진채선
고창 출신…소리 재능 타고나
17세 때 桐里 소리학교 들어가
남성 전유물 기존 관념 뒤집어
춘향가·심청가 잘 불렀다 전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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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재효는

동리(桐里) 신재효의 선대 조상은 서울에 살았고, 대대로 하급 무반직을 지냈다. 부친 신광흡(1771~1844)이 서울에서 고창의 경주인(京主人)을 하다가 고창으로 옮겨가 고창의 향리가 되었고, 또한 관약방(官藥房)을 운영했다.

신재효는 고창에서 태어나 이방·호장 등 고창의 향리를 역임했다. 1876년 이재민들을 돕기 위해 돈을 기부하였으며, 경복궁 중건에 원납전을 내어 1877년에 통정대부(通政大夫)의 품계와 ‘절충장군(折衝將軍) 행(行) 용양위(龍衛) 부호군(副護軍)’의 직함을 받았다.

그가 ‘사나이로 조선에 생겨/ 장상댁(將相宅)에 못 생기고/ 활 잘 쏘아 평통할까/ 글 잘한다 과거할까’라고 읊은 글귀를 보면, 자신의 신분상 처지와 현실에 불만도 있었던 것 같다. 그런 그는 마흔살이 넘어서는 향리를 그만두고 동리정사(桐里精舍)에서 유유자적하며 판소리 연구와 창작에 열정을 쏟았다.

신재효는 한문을 배워 몇 편의 한시를 남기기도 했으나, 무엇보다 그의 두드러진 예술 활동은 판소리 관련 활동이다. 신재효가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등 판소리 관련 활동을 본격적으로 전개한 것은 향리의 직책에서 물러난 1860년 이후로 추정된다.

개인적인 취향 외에 그가 판소리에 특별한 관심을 갖게 된 계기로는 판소리가 발달한 호남 지역에서 생장하였다는 점과 특히 전라도 감영과 각 군현의 이서(吏胥)들이 관청에서의 각종 연회 때 판소리 창자들의 선발과 초청에 관여한 풍속을 들 수 있다. 그의 향리로서의 신분 의식도 판소리 사설 정리와 개작 활동의 계기가 되었으리라고 추정된다.

중앙에서 파견된 수령의 밑에서 지방의 행정 실무를 맡은 향리는 양반계층보다 낮은 신분이어서 관직 진출과 사회적 대우 등에서 큰 차별을 받았다. 신재효가 향리 생활을 했던 19세기 후반기는 부정부패 등으로 향리계층에 대한 사회적 인식이 급격히 악화된 때였다. 신재효는 이러한 향리에 대한 신분 제약과 사회적 인식에서 유발된 심리적 갈등을 판소리를 매개로 표출하고자 한 것으로 볼 수 있다.

판소리 사설 정리 및 개작, 판소리 단가 창작, 판소리 이론 탐구와 비평 활동, 판소리 창자 교육과 후원 등 신재효의 판소리 관련 활동은 판소리사에서 획기적인 의의를 지닌다.

첫째, 그가 정리·개작한 판소리 사설 여섯 마당은 비록 열두 마당 전부는 아니지만 개인에 의한 최초의 판소리 사설의 집대성이라 할 수 있다.

둘째, 그가 정리·개작한 사설들은 연행 현장에서 창으로 불리고 또 전승되지는 못했지만 부분적으로는 후대 명창들에 의해 수용되었다. ‘남창춘향가’의 서두 부분이 김창환, 정광수, 김소희 등에 의해 수용되었다. 임방울의 유명한 더늠이 된 ‘쑥대머리’의 사설 역시 남창춘향가에서 온 것이다.

셋째, 그의 판소리 사설 여섯 마당은 판소리 사설의 역사적 변이를 판단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가 된다. 판소리 창본과 판소리계 소설의 성립 연대를 실증적으로 파악하기 어려운 상황에서 신재효의 판소리 사설은 비교적 그 정리·개작 연대가 분명해서 여러 판소리 창본과 판소리계 소설의 성립 연대를 추정할 수 있는 근거가 된다.

넷째, 그의 판소리 이론 정립과 비평 활동은 19세기 후반에 이르러 판소리가 판소리 비평 활동과 이론적 탐구를 필요로 할 만큼 성장했음을 말한다. 신재효가 그러한 필요에 선구적으로 부응했던 것이다. ‘조선창극사’에 따르면 신재효와 같은 시기에 정춘풍이 판소리 비평으로 신재효와 쌍벽을 이루었다고 했다. 이 시기에 판소리 비평 활동이 판소리계 내부에서 부상하고 있었던 것이다.

다섯째, 그의 판소리 창자 교육과 후원 역시 판소리 역사에서 획기적인 일이다. 판소리 후원은 신재효 이전에도 있었고 이후에도 있었던 일이지만, 전문적인 판소리 창자가 아닌 인물이 교육까지 담당한 것은 신재효가 처음이다.

여섯째, 신재효가 진채선을 비롯한 여류 판소리 창자들을 교육한 것도 주목할 일이다. 기생이 판소리 창자로 전환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었고, 진채선 이전에 판소리를 부른 기생이 있었음은 안민영의 ‘금옥총부(金玉叢部)’에서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기생들을 판소리 창자로 교육한 것은 신재효가 처음이라 할 수 있다. 20세기에 여성 판소리 창자들이 대거 등장한 점에 비추어 보면 신재효의 여성 창자 교육은 선구적이라고 할 수 있다.

신재효는 독자적인 비평 의식에 입각하여 판소리 사설을 정리·개작했을 뿐만 아니라 판소리에 대한 독자적인 이론을 정립하고 판소리 창자들을 교육하고 후원하였다. 신재효의 이러한 활동과 성과들은 19세기 후반기의 판소리계 동향을 이해하는 중요한 지표이자 성취다.


◆진채선은

전라북도 고창에서 무녀의 딸로 태어났다. 타고난 재능으로 어려서부터 소리를 잘했다. 진채선의 소리 재능을 보고 17세 때 신재효가 그녀를 발탁했고, 그녀는 신재효가 운영하는 소리학교에 들어가 판소리를 배운 뒤 최초의 여류 명창이 되었다. 진채선의 소리는 당시 남성들의 전유물이었던 판소리의 관념을 뒤집는 것으로 여성의 목소리로 판소리 명창 반열에 오른 것이었다.

고종 때 경회루에서 열린 경복궁 낙성연에서 출중한 기예를 발휘하여 청중을 놀라게 하였으며 흥선대원군의 총애를 받았다. 진채선은 고창으로 돌아가지 못하고 운현궁에 머물며 흥선대원군의 첩실이 되었다. 이 때문에 신재효는 ‘도리화가’를 지어 제자에 대한 그리움을 전했다. 후일 진채선은 고창으로 돌아와 스승의 임종을 지켰다고 전해진다. 이후 진채선은 사라지고 그녀의 행방은 알려진 바가 없다. 진채선은 ‘춘향가’와 ‘심청가’를 잘 불렀고, 특히 춘향가 중 ‘기생점고’ 대목에 뛰어났다고 한다.

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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