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칼럼] 불에 탄 ‘無價之寶’

  • 배 재 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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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17   |  발행일 2017-04-17 제31면   |  수정 2017-04-17
[월요칼럼] 불에 탄 ‘無價之寶’
배 재 석 논설위원

일제강점기 막대한 사재를 들여 우리 문화재를 지킨 간송(澗松) 전형필(1906~62)은 문화재 독립운동가로 통한다. 그가 수집한 문화유산은 광복 후 그 가치를 인정받아 12점은 국보, 10점은 보물, 4점은 서울시지정문화재로 지정됐다. 이 중에서도 간송이 최고로 아낀 것은 훈민정음 해례본(간송본·국보 70호)이다. 간송은 1943년 진성이씨 회양당 종택 출신으로 광산김씨 종택 긍구당 사위인 안동의 이용준이 이 책을 1천원에 팔려고 한다는 소식을 듣고 요구한 책값의 10배인 1만원을 주고 구입했다. 책을 소개한 국문학자 김태준에게는 따로 1천원을 지불했다. 당시 1천원은 서울의 기와집 한 채 값이다. 6·25전쟁이 일어나자 그는 훈민정음을 오동나무 상자에 넣어 혹시라도 잃어버릴까 낮에는 가슴에 품고 다니고, 밤에는 베개 삼아 베고 자며 한순간도 몸에서 떼지 않았다고 전해진다.

간송이 애지중지한 훈민정음 해례본은 세종이 한글을 창제한 취지를 밝힌 어제서문과 음가와 용법을 설명한 예의편, 집현전 학사들이 제자원리와 자모체계를 해설한 해례편, 정인지 서문으로 구성돼 있다. 어제서문과 예의편은 세종실록이나 월인석보에도 내용이 전하지만, 해례는 그동안 세상에 전혀 알려져 있지 않았다. 간송본이 발견되기 전까지만 해도 한글은 고대글자 모방설, 몽고글자 기원설, 심지어 창살 모양설까지 일제강점기 어용학자들의 폄훼가 심했다. 하지만 이 해례본이 발견되면서 비로소 한글이 과학적으로 기획된 글자라는 사실이 밝혀졌다.

이처럼 ‘무가지보(無價之寶)’나 다름없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2008년 상주에도 나타나 또 한 번 세상을 놀라게 했다. 고서적 수집가 배익기씨가 집 수리과정에서 나왔다며 공개한 것이다. 당시 문화재청의 감정 결과 서문 4장과 뒷부분 1장이 없어졌지만 간송본과 동일한 판본으로 판명됐다. 무엇보다 표기·소리 등에 대한 주석이 16세기에 더해진 것으로 확인돼 학술적 가치가 간송본을 능가한다는 평가를 받았다. 그러나 상주본은 실물이 공개된 직후 골동품상 조모씨와 소유권 분쟁에 휘말려 이내 자취를 감췄다. 오랜 법정다툼 끝에 대법원이 소유권은 조씨에게 있지만 배씨가 훔친 것은 아니라는 애매한 판결을 내리면서 상주본은 더 깊숙이 숨어버렸다. 그후 조씨는 실물을 확보하지 않은 상태에서 상주본을 문화재청에 기증하고 2012년 사망했다. 문화재청은 상주본의 소유권이 국가에 있는 만큼 법적 조치를 통해 국가로 귀속한다는 입장이다. 반면 배씨는 진상규명과 명예회복을 주장하며 버티고 있다. 그 와중에 2015년 배씨 집에 불이 나면서 소실된 게 아니냐는 우려를 낳기도 했다.

다행히 그동안 행방을 몰라 애태웠던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이 최근 다시 모습을 드러냈다. 국회의원 재선거에 나섰던 배씨가 지난 10일 상주본의 일부라며 사진을 공개한 것이다. 하지만 9년 만에 우리 앞에 나타난 상주본의 상태는 분노와 안타까움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처음 알려질 당시와는 달리 아랫부분이 불에 타는 등 훼손 흔적이 뚜렷했다. 더욱이 공개한 사진의 배경에는 솔잎과 참나무 잎 등 낙엽이 보여 상주본의 처지가 ‘풍찬노숙’ 신세에 놓여 있음을 짐작하게 했다. 지하에 계신 전형필 선생이 알면 통탄할 일이다.

2008년 2월10일 밤 우리는 국보 1호 숭례문이 불길에 허망하게 사라지는 기막힌 모습을 지켜봐야만 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운명도 그런 전철을 밟지 말라는 법이 없다. 그간의 사정이야 어찌 됐든 조건 없이 실물을 공개하고 조속히 보존 대책을 강구해야 하는 이유도 이 때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 같은 귀중한 문화재는 한 개인의 소유물이기 이전에 후손에게 길이 물려줄 민족의 자산이다. 만에 하나 지켜내지 못한다면 우리 모두가 역사에 죄를 짓는 일이다. 정부도 법적조치와 더불어 문화재 환수와 관리에 허점이 없는지 되돌아보고 개선책을 찾아야 할 것이다. 다만 지금의 보유자가 상주본의 존재를 세상에 처음으로 알린 공도 있는 만큼 억울한 점은 없는지 그의 주장에 좀 더 귀 기울이고 적절한 보상 방안도 고려할 필요가 있다.
배 재 석 논설위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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