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단상] ‘홍찍문’의 실체

  • 인터넷뉴스팀
  • |
  • 입력 2017-04-15   |  발행일 2017-04-15 제23면   |  수정 2017-04-15
[토요단상] ‘홍찍문’의 실체
최병묵 정치평론가

“…김대중씨는 정주영씨가 실컷 잘 싸워주기를 바랄 것이 뻔하다. 다시 말해 김대중씨의 승산은 김영삼·정주영씨 둘이서 피투성이가 돼 중부권 일대의 비(非)김대중 표를 짝 갈라놓아야 서는 것이다.”

1992년 11월28일자 조선일보 5면에 실린 ‘정주영 변수’란 칼럼의 일부분이다. 1992년 대선은 김영삼(YS), 김대중(DJ), 정주영 후보의 각축전이었다. 거칠게 표현하면 YS가 부산·경남, DJ가 호남표를 싹쓸이한다고 가정할 때 결국 중부권만 남는데, 여기서 정주영 후보 득표가 YS표를 갉아먹어 DJ의 당선 가능성을 높여준다는 주장이다.

선거 결과를 보면 YS가 영남의 68%(약 475만표), DJ가 호남의 91%(281만표)를 가져갔다. 전국 종합은 YS 998만, DJ 804만, 정주영 388만표였다. 중부권에선 모두 1천373만명이 투표에 참여했다. 1992년 11월 말 정 후보의 지지율은 ‘아파트 반값’ 등의 공약에 힘입어 상승세였으니, 정 후보가 고향인 강원도표(34% 득표)를 더 쓸어담고 중부권서 약진했다면 YS와 DJ의 승부가 엇갈렸을 수도 있겠다. 실제 노태우정부가 아파트 반값 공약의 ‘허구성’을 공격하고, 정 후보의 돈줄(현대중공업 비자금) 수사를 하지 않았다면 ‘정찍대중’은 현실이 됐을지도 모른다. 선거일을 20일 넘게 남겨둔 상태에서 상승세인 특정 후보를 ‘들러리’로 폄훼하는 ‘정찍대중’을, 그것도 언론사가 앞장서 거론할 수 있느냐는 윤리 문제를 별개로 하면 말이다.

5년 뒤인 1997년 대선 때도 상황은 비슷했다. 이회창, 김대중, 이인제 후보의 3파전에서 또다시 ‘인제찍김’ 주장이 나왔다. 이번에는 특정 언론에서 나온 게 아니라 이회창 진영에서 퍼뜨렸다. “이인제 찍으면 김대중 된다”가 요지였다. DJ에 대한 영남권 유권자의 거부감이 워낙 센 점을 이용한 지역감정 조장 전략이다. 이인제 후보 진영은 “이인제 찍으면 이인제 된다”로 맞섰다. 언론플레이도 극에 달했다. YS 청와대가 이인제 진영에 창당자금 등을 지원하고 있다는 밑도 끝도 없는 주장이 여권 관계자 말을 인용해 언론을 탔다. 당시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맹폭에 제3후보(이인제)가 흔들리는 건 당연했다. 이인제 지지율이 급전직하했는데도 493만표를 얻었다. DJ는 1천33만표로 대통령이 됐다. 2위 이회창 후보(994만표 득표)와 39만표 차였다. 40만명이 ‘이인제 찍으면 DJ 된다’는 말을 믿고 마음을 돌렸다면 1998년부터 5년간 ‘이회창 대통령 시대’를 맞이했을 뻔했다.

이로부터 20년이 지난 2017년 5월, 여러번 본 듯한 장면이 정치권에 다시 나타났다. 오늘부터 시작하는 후보 등록 이후 3주 동안 열띤 선거운동이 펼쳐질 것이다. 각 후보는 회심의 수성(守城) 또는 역전 카드를 들고 나올 것이다. 그러나 여론은 이미 대선 구도를 짜놓은 듯하다. 박근혜 전 대통령 탄핵으로 보수·진보의 이념적 운동장은 기운지 오래다. 보수정당이라는 자유한국당과 바른정당이 합쳐진들 ‘정권’을 노리기에는 국민 다수의 마음에서 멀어진 것이 여론조사에서 확연하다. 5·9대선에서 문재인·안철수 후보가 1·2위 다툼을 벌일 것이란 예상은 본격적인 선거운동에 들어가기도 전에 상식의 범주에 속한 일이 되고 말았다.

1992년과 97년 대선처럼 ‘○○○ 찍으면 ○○○ 된다’는 선거 캠페인이 먹혀들 소지가 많다는 말이다. 이미 박지원 국민의당 대표는 “홍준표 찍으면 문재인 된다”고 주장하고 있고, 홍 후보는 ‘홍찍홍’으로 맞서고 있다. 2017년 대선 구도가 1997년 상황의 판박이인 셈이다. 아무래도 안철수·홍준표 후보 간 지지 성향이 상당 부분 겹치기 때문이리라.

게다가 이번 대선에서 1·2위 간 득표 차이도 크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당장 14일 발표된 한국갤럽 다자간 여론조사에서 문 후보는 40%, 안 후보는 37%로 접전 양상을 보이고 있다. 선거가 임박할수록 두 후보 간 격차가 줄어들 것이다. 그 경우 ‘홍찍문’은 곧바로 정치현상이 될 것이다. 보수 세력의 입장에선 최악(最惡)을 피하기 위해 차악(次惡)의 선택을 강요받는 상황이 돼버렸다. 참 얄궂은 선거다.

영남일보(www.yeongnam.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

오피니언인기뉴스

영남일보TV





영남일보TV

더보기




많이 본 뉴스

  • 최신
  • 주간
  • 월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