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대구로에서] 승마선수 정유라의 힘

  • 유선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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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12   |  발행일 2017-04-12 제30면   |  수정 2017-04-12
30여년 전과 다르지 않은 체육특기생 부실학사관리
정부의 대책 마련 배경엔 승마선수 정유라의 비리…사회에 긍정적 영향 관심
[동대구로에서] 승마선수 정유라의 힘

1980년대 초반 기자가 다닌 고등학교에는 야구부와 역도부가 있었다. 1·2학년 때 야구부, 역도부 선수 1명씩과 같은 반이었다. 이들은 수업에 거의 참석하지 않았다. 어쩌다 오전 수업에 들어오지만 책은 없었다. 역도선수는 2㎏ 정도되는 아령 두 개를, 야구선수는 실밥이 터진 공을 한 보따리 챙겨 왔다. 역도선수는 주로 잠을 잔다. 가끔씩 눈을 뜨면 앉은 채로 아령을 들었다 놓길 반복했다. 야구선수도 거의 잔다. 혹시 일어나 있을 때면 실밥이 터진 야구공을 기웠다. 이들은 기자와 함께 대학에 진학했다. 체육 특기생으로 고등학교에 입학해 3년 동안 수업 한번 제대로 듣지 않고 또다시 특기생으로 대학에 들어갔다.

이로부터 30여년이 지났다. 운동부가 있는 우리나라 고등학교의 교실은 그때와 크게 다르지 않다. 학생 선수들이 학업과 운동을 병행할 수 있도록 한 규정과 제도가 없다. 때문에 이들의 학습권이 보장되지 않는다. 운동선수들의 수업 참여 빈도는 여전히 낮다. 설령 교실에 들어왔다고 해도 수업엔 거의 관심이 없다. 교실 밖에서 죽어라 운동만 한다. 이들은 자신들의 부모세대와 다르지 않은 방식으로 대학에 들어갈 가능성이 높다. 입학한 후에는 선배 체육특기생들이 했던 것과 같이 거의 절대적인 시간을 강의실 밖에서 보낼 것이다.

1972년 체육특기자 제도 도입 이후 정부는 학교체육과 체육 특기자 제도의 개선에 대한 필요성에 공감했다. 공부하는 학생 운동선수 육성을 위해 다양한 개선책을 내놨다. 관행처럼 이어져온 체육 특기자들의 잘못된 학습문화는 좀처럼 고쳐지지 않았다. 여전히 상당수 학교와 대학에서는 이를 방조하거나 모른 체한다.

그런데 올들어 심상찮은 조짐이 보이고 있다. 교육부가 칼을 빼들었다. 체육특기자 제도 개선방안을 만든 것이다. 핵심은 몇 년 후부터 대학이 체육특기자 입학전형을 진행할 때 학생부를 반영해야 한다. 또 고교가 체육특기자를 선발할 때 내신성적이나 최저학력 여부를 반영한다. 최저학력에 못 미치는 체육특기자는 전국(국제)대회 참가를 제한할 방침이다.

교육부의 개선안 발표에 앞서 한국대학스포츠총장협의회는 학점 평점이 C 미만인 대학생 선수의 경기 출전을 금지하는 것을 골자로 한 ‘C룰’을 적용하고 있다. 지난해 1·2학기 평균 학업성적이 C가 되지 않는 선수들에게 올해 협의회가 운영하는 농구, 축구, 배구, 핸드볼 등 4개 종목 출전을 불허했다.

정부와 대학당국의 갑작스러운 대책 마련과 실행 배경이 궁금하다.

이설의 여지가 없다. 승마선수 정유라의 덕이다. 우리사회를 경악하게 만들고 대통령 탄핵의 단초를 제공한 정유라가 그 누구도 하지 못했던 ‘학교 엘리트 체육 부조리 뜯어 고치기’에 일등공신 역할을 하려 한다. 한국에서 체육특기생으로 활동할 때는 물론이거니와 이국에서 영어(囹圄)의 몸이 돼 있어도 정유라는 정말 대단한 힘을 가진 것 같다.

문득 2007년 한국 사회를 떠들썩하게 만들었던 사건 하나가 생각난다. ‘신정아 학력위조사건’이다. 이 사건은 우리사회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시민들로 하여금 “학력을 조작해서는 안 된다”는 공감대를 가지게 했다.

그렇다면 신정아보다 더 강력한 힘으로 나라를 들었다 놨던 정유라는 어느 정도의 긍정적인 영향을 우리 사회에 줄 수 있을까.

모든 일을 대신해 줬던 엄마가 곁에 없어 쉽지 않을 듯 보이지만 적어도 짧게는 수년에서 길게는 10여년간 공부와 담을 쌓아왔던 전국 6만6천630여명 학생 운동선수의 발등에 불을 떨어트린 건 팩트다.

유선태 (체육부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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