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항 칠포리에 위치한 암각화로 ‘Y’자 문양의 그림이 새겨져 있다. |
고인돌이 주택 담벼락의 일부가 됐다. 김진규 포항시 학예연구사가 고인돌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
우리 국민에게 포항이라는 도시는 ‘산업의 쌀’로 불리는 철강을 생산하는 곳이자 한국경제의 발전을 이끈 공업도시로 각인돼 있다. 이 때문에 포항은 역사나 문화와는 거리가 먼 도시쯤으로 인식되고 있다. 그러나 포항은 ‘지붕 없는 청동기시대 유물 박물관’이라 해도 과언이 아닐 만큼 고인돌·암각화 등 선사시대 유적이 곳곳에 산재해 있다. 또한 현존 신라 금석문 중 최고(最古)인 중성리 신라비 등 국보급 유물이 발견되기도 했다. 영남일보는 수천년의 시간을 머금고 포항 곳곳에 흩어져 있는 유적과 유물을 찾아 나섰다.
◇영일 칠포리 암각화
방패·사다리꼴·Y문양…
문양만큼 해석도 가지각색
‘오줌바위’ 희귀 암각화 정평
◇기계면 성계리 고인돌
포항 고인돌 3분의 1 집중
칠성재, 높이 3.7m 무게 200t
거대 고인돌 산 중턱에‘우뚝’
성계마을엔 7개 고인돌 산재
◆문양 다양한 암각화의 본고장
지난달 28일 오전 선사시대의 유물을 포항에서도 볼 수 있다는 설레는 마음을 품고 답사에 나섰다. 가장 먼저 찾은 곳은 북구 흥해읍 칠포해수욕장 인근 곤륜산 기슭에 자리잡은 ‘영일 칠포리 암각화’(경북 유형문화재 제249호). 차에서 내리자 눈살부터 찌푸려졌다. 멸치 냄새가 코를 찔렀기 때문이다. 암각화를 보기 위해서는 멸치공장이 있는 사유지를 통과해야 한다. 포항시가 이 땅을 매입하려 했지만 소유주가 높은 가격을 불러 매입하지 못했다고 한다.
실망감을 뒤로하고 8분여 만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이곳에는 그림이 새겨진 바위가 3개 있다. 가장 큰 바위는 길이 3m, 높이 2m의 사암질로 방패 모양이 새겨진 그림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이 바위에서 5m 아래쪽에 자리한 바위에는 사다리꼴 모양의 그림이 그려져 있다. 오른쪽으로 3m 옆에는 ‘Y’문양의 그림이 새겨진 바위가 놓여 있다. 특이한 문양만큼이나 해석 또한 분분하다. 방패 모양은 사람의 얼굴, 추상화된 가면, 돌칼의 손잡이를 닮은 검파형 등 다양한 주장이 나오고 있다. 칠포 암각화는 1989년 첫 발견된 이래 1994년까지 총 15개가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규모면에서는 한국 최대의 암각화군이다.
또 청하면 신흥리 오줌바위의 ‘별자리형 바위구멍’ 유적은 천문을 관측해 새긴 희귀한 암각화로 정평이 나 있다. 기계면 인비리 암각화는 1985년 발견 당시 전국적인 관심을 끌었다. 고인돌의 덮개돌 측면에 마제석검 두 자루와 석촉 모양의 암각화가 새겨져 있어 고인돌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되고 있다. 지난 1월에는 포항시 남구 동해면 약전리 야산에서 물고기·칼·방패 모양이 새겨진 암각화가 새로 발견돼 이목이 집중되기도 했다.
검파형, 방패형, 별자리 등 다양한 암각화가 발견된 포항은 ‘한국형 암각화’의 본고장이라 해도 손색이 없다. 김진규 포항시 학예연구사는 이들 암각화에 대해 “청동기시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된다. 신앙의례를 반영한 풍요와 다산을 기원하는 제단으로서의 성격을 지닌 것으로 보고 있다”고 설명했다.
칠성재 고인돌의 상석을 받치고 있는 돌. |
◆고인돌을 품은 기계면 성계리
고인돌(지석묘)은 청동기시대의 대표적인 무덤이다. 지하에 묘실을 설치한 뒤 그 위에 상석을 놓고 돌을 괴는 형식으로 만든다. 포항시 북구 기계면에는 114기의 고인돌이 산재해 있다. 포항의 현존 고인돌의 3분의 1이 이곳에 집중돼 있다.
둘째 탐방 지역은 바로 북구 기계면 성계리 칠성재다. 영남 최대 규모의 고인돌이 이곳에 자리하고 있다. 칠성재에 오르면 가로 4.8m, 세로 4.7m, 높이 3.7m의 고인돌이 눈에 들어온다. 무게만 200t에 이를 것으로 추정되는 이 고인돌은 굄돌 3개가 상석을 받치고 있는 모양새를 하고 있다. 이처럼 어마어마한 크기의 바위를 산 중턱까지 옮겼다는 생각에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인근에는 이보다 작은 고인돌 6기가 더 있다.
성계마을로 발걸음을 옮겼다. 고인돌이 마을 전체에 퍼져 있다. 마을 입구의 담벼락에 그려진 고인돌 벽화가 방문자의 눈길을 붙잡았다. 벽화를 뒤로하고 마을을 둘러봤다. 커다란 운석이 떨어진 것처럼 7개의 고인돌이 마을 곳곳에 박혀 있었다. 사실 담벼락의 일부가 된 경우가 많아 곧바로 고인돌이라고 알아보기는 어려운 것도 있었다. 또 일부는 집안의 조경석으로 쓰이거나 아예 주인이 천막으로 가린 것도 목격돼 안타까웠다. 마을 언저리에 조성된 공원의 고인돌에서는 민간 신앙의 기원을 담은 듯 상석 표면에 원형의 홈이 파인 성혈을 볼 수 있었다. 문성리 입구에 있는 문성 고인돌(할미바위)은 칠성재 고인돌보다 작지만 더 유명하다. 무게 100t에 달하는 거대한 돌이 들판에 우뚝 서 있기 때문이다.
포항의 고인돌은 2002년 포항문화유적분포 조사 결과, 기계·흥해·동해·구룡포·호미곶 등에 335기가 산재해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하지만 농경지 정리 작업이 시작되기 전인 1990년대까지만 해도 500여기의 고인돌이 포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김진규 학예사는 “기계면은 기계천과 넓은 평야가 위치해 집단거주 환경이 갖춰진 곳”이라며 “고인돌의 크기는 당시 무덤 주인의 신분과 영향력을 설명해준다”고 말했다.
신광면사무소에 보존된 영일 냉수리 신라비. |
◆국보 냉수리·중성리 신라비
북구 흥해읍 신광면사무소 마당 한편 보호각 안에는 영일 냉수리 신라비(국보 제264호, 503년 제작)가 있다. 1989년 3월 신광면 냉수2리 밭에서 출토돼 세상에 알려졌다.
비문은 503년(신라 지증왕 4) 만들어졌으며, 오늘날 공문서 같은 역할을 한 것으로 추정된다. 절거리(節居利)라는 인물의 재산 소유를 인정하고 그가 죽은 뒤의 상속 방법을 결정했다고 적어 놓았다. 일종의 재산권 분쟁의 판결문이다. 이 결정 과정에는 각 부의 귀족 7명(7명의 왕)이 참가한 것으로 적혀 있는데 이를 통해 당시 약했던 신라왕권의 모습을 엿볼 수 있다는 해석도 있다. 또 앞으로 다른 사람이 재산과 관련해 문제를 일으킬 경우 중죄로 다스릴 것이라는 경고를 담고 있다.
이 비문은 평범하며 만든 기법도 특이하지 않다. 하지만 학술적 가치는 이루 말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포항의 첫 국보로 지정된 유물치곤 매우 초라해 보여 아쉬웠다.
냉수리 신라비보다 최소 2년 먼저 만들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중성리 신라비(2009년 발견·국보 제318호)는 현존 최고(最古) 신라비다. 501년(신라 지증왕 2)에 제작됐을 것으로 추정된다. 이 비문 역시 재산권 분쟁을 조정하는 일종의 판결문 성격을 띠고 있다. 신라 전기의 소송 내용, 제도, 관등체계, 지방의 행정단위 등 당시 정치·경제·문화적 상황을 살펴볼 수 있는 유물로 매우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비는 포항이 아닌 경주문화재연구소에 보관돼 있다.
포항=김기태기자 ktk@yeongnam.com
김기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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