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류혜숙의 여행스케치] 경남 합천 함벽루·연호사

  • 류혜숙 객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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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07   |  발행일 2017-04-07 제36면   |  수정 2017-04-07
황강에 바투 선 함벽루…비만 오면 눈물 뚝, 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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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는 처마에서 황강으로 바로 떨어지는 낙수로 유명하다. 강변 산책로는 누각의 축대에서 조금 떨어져 설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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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 뒤편 암벽의 함벽루 각자. 우암 송시열의 것이다.

“뜨거운 모래!”라고 읊조린다. 합천 황강과 뜨거운 모래는 언제나 같은 의미였다. 어느 여름 그 모래에 누웠을 때 별들이 활처럼 쏟아져 심장에 꽂혔다. 심장에서부터 흘러내린 피가 모래를 적시고 강으로 흘러들었고 고막 속에서는 백제군과 신라군의 함성이 터져 나와 사람들의 노랫소리에 섞여 들었다. 시절과 시대가 포개지는 황강. 오늘 그 강변의 작은 산 남쪽 가장자리를 따라 걸으며 저편의 모래를 본다. 여전히 뜨거운 모래일까. 여전히 별들은 쏟아져 내릴까.

◆신라의 변방, 대야성

합천읍 한가운데에 해발 90m 정도의 작은 산이 봉긋하게 솟아 있다. 언덕이라기엔 넘치고 산이라기엔 모자란 이 작은 동산은 매봉산, 혹은 취적산, 또는 황우산이라고도 한다. 산 정상부에는 오래된 성의 흔적이 남아 있다. 신라가 백제의 침공에 대비해 쌓은 대야성이다. 이 일대는 삼국시대 신라와 백제의 접경지대로 대야성은 신라 서부지역의 전략적 요충지였다.

642년, 백제 장군 윤충의 1만 대군이 대야성을 포위했다. 당시 대야성 성주는 김품석, 그의 아내는 김춘추의 장녀 고타소였다. 품석은 곧 항복하여 가족을 죽인 뒤 자결했다고 전해진다. 삼국사기 백제본기는 “윤충이 그들을 모두 죽이고 품석의 목을 베어 왕도에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나머지 병사를 모아 끝까지 항전한 이가 있었으니 바로 죽죽(竹竹)이다. 그는 “아버지가 나를 죽죽이라 이름 지은 것은 추운 데에도 시들지 않고 꺾일지언정 굽히지 말라 함이다. 어찌 죽음을 겁내 살아 항복하리오”라며 장렬하게 싸우다 전사했다. 매봉산의 동쪽 자락을 밟고 남쪽으로 향하다 보면 산기슭에 신라 충신 죽죽을 기리는 비석이 있다.

대야성의 주인은 여러 번 바뀌었다. 경덕왕 4년인 920년에는 후백제를 일으킨 견훤에게 함락되었고, 927년엔 왕건의 군대에게 빼앗겼다가 이후 다시 견훤에게 넘어가는 등 수차례 전란을 겪었다. 성은 936년 최종적으로 고려가 차지했다. 지금 대야성은 석벽의 일부가 남아있을 뿐 대부분 훼손되어 원형을 알아볼 수 없다.

해발 약 90m 매봉산 정상의 대야城
백제와 접경한 신라 서부 요새 흔적
산 남쪽 강섶엔 고려 때 세운 함벽루
이황·조식 등 수많은 시인묵객 시판

‘해인사의 큰집’이라 불리는 연호사
대야성전투 이듬해 원혼 달래려 창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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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 초입 강변에 조성되어 있는 황강 마실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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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벽루 대들보에 퇴계 이황의 글과 남명 조식의 글이 마주보고 있다.

◆푸름이 젖어드는 곳, 함벽루

죽죽비를 지나쳐 산의 남쪽에 다다르면 황강이다. 강변을 따라 ‘황강마실길’이 나 있다. 길이 둥글게 돌자 석벽을 등지고 황강을 굽어보는 누각과 마주친다. 하늘 높이 치켜세운 추녀가 뱃머리처럼 당당하다. 함벽루(涵碧樓) 현판이 누각의 측면, 즉 강변 진입로에서 바로 마주하는 자리에 걸려 있다. 푸름이 젖어드는 함벽, 마디마디 힘이 느껴지는 글씨다. 정면에는 ‘제일강산’이란 현판이 걸려 있다. 주변 석벽에는 사람들 이름이 가득하다. 저마다 앞다투어 “내가 여기에 왔노라” 소리친다.

함벽루는 고려 충숙왕 8년인 1321년에 세워졌다. 당시 황강 물줄기를 타고 많은 나무가 둥둥 떠내려 왔는데 사람들은 나무를 건져내 무엇에 쓸까 고민하다 정자를 세웠다 한다. 단청을 새로 입혀 옛 맛은 덜하지만 연륜은 깊다. 강 건너편 모래밭은 황강 레포츠 공원이다. 강변 건물들 너머에는 정양호(正陽湖)라는 아름다운 습지가 있다. 지금 이곳에서는 보이지 않지만 예전에는 능히 바라다 보였다 한다.

비가 오면 빗물은 함벽루 지붕 기왓골을 타고 흘러 처마 끝에서 황강으로 떨어졌다. 꽃잎 같은 암막새가 뚝뚝 눈물을 흘렸고, 눈물은 강물이 되어 흐엉흐엉 흘렀다. 그것이 함벽루의 가장 아름다운 모습이었다고 사람들은 기억한다. 합천군은 강변 산책로 공사를 하면서 함벽루 축대와 닿아 있는 황강 바닥을 3m 정도 폭으로 매립해 길을 냈다. 누각 아래는 특별히 축대와 거리를 두고 다리형식으로 설치되었지만 함벽루 뒤쪽으로 에두르는 길이었어도 좋았지 않았나 하는 아쉬움이 있다.

내부에는 수많은 편액이 빼곡하다. 여러 시인 묵객이 남긴 시판들은 얼마나 많은 이들이 이곳의 풍취에 도취되었나를 이야기한다. 동의한다. 이 깊은 동의는 일종의 수줍은 우정을 느끼게 한다. 가운데 대들보에는 퇴계 이황의 글과 남명 조식의 글이 마주보고 있다. 조용조용히 주거니 받거니 하는 낮은 음성이 들리는 듯하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비늘처럼 반짝이는 물결이 강의 흐름을 보여준다. 강은 흐르고, 누각은 배처럼 떠내려가는 듯하다. 둥둥둥둥 머릿속에서 출항의 불안과 같은 북이 울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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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강변 낭떠러지에 오밀조밀 들어앉은 연호사. 대야성 전투에서 죽은 젊은 원혼들을 위한 절집이다.

◆원혼을 달래기 위한 절집, 연호사

함벽루 바로 왼쪽에는 신라시대의 고찰 연호사(烟湖寺)가 자리한다. 대야성 전투의 이듬해인 643년, 김품석과 고타소 그리고 신라 장병 2천여명의 원혼을 달래기 위해 와우선사가 지었다는 절집이다. 연호사는 낯선 이름이지만 합천 사람들은 ‘해인사의 큰집’이라 부른단다. 극락전, 범종루, 삼성각, 요사채가 오밀조밀 모여 앉았다. 손바닥만 한 절집 마당에 붉은 동백이 처연하고 꽃망울 진 벚꽃이 해맑다.

연호사는 함벽루와 마찬가지로 절벽을 등지고 앉아 있지만 불안하지 않다. 오히려 평온하다. 강 건너 모래밭이 가녀리다. 비는 어제 왔고, 핏자국은 씻기어 강물과 함께 흘러갔다. 아직도 뜨거운 모래일까, 여전히 별들은 쏟아져 내릴까. 오늘의 물음이 시절과 시절의 중첩 위에 다시 한 겹 포개진다.

흐린 날에는 신라의 젊은 영혼이 함벽루에 기대서서 물끄러미 강물을 바라본다고 한다. 그러다 인기척이 나면 사라져 연호사 여승들을 한번씩 놀라게 한다는 소문이 있다. 언뜻 함벽루에 서있는 사람들을 본 듯도 하다. 함벽루는 물빛 속으로, 산 빛 속으로, 하늘빛 속으로 출항한다. 날아오른 함벽루가 그들을 먼 곳으로 데려가는 꿈을 꾼다.

여행칼럼니스트 archigoom@naver.com

☞ 여행정보 대구 달성군을 지나 26번 국도를 타고 고령 방향으로 간다. 고령 시내를 가로질러 합천, 거창 방향으로 가다 귀원삼거리에서 합천방향 33번 국도를 탄다. 합천대교 지나 합천읍으로 빠져나가 군청방향으로 가다 보면 남정교 교차로다. 잠시 후 오른쪽 합천호국공원 이정표를 따라 들어가면 신라충신 죽죽비가 가장 먼저 보이고 조금 더 가면 연호사 입구다. 강변 산책로를 따라 5분 정도 가면 함벽루에 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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