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6]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신재효와 진채선(上)

  • 김봉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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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06   |  발행일 2017-04-06 제22면   |  수정 2017-04-06
애제자 채선을 운현궁에 뺏긴 동리…간절한 그리움 ‘桃李花歌’에 담아
밤비에 새잎나거든
[선비들의 사랑이야기 .16]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신재효와 진채선(上)
1979년 1월 중요민속자료 제39호로 지정된 신재효고택 사랑채(전북 고창군 고창읍 읍내리). 신재효가 여생을 마친 1884년까지 기거한 동리정사(桐里精舍)는 1850년대에 건축한 것으로 추정되며, 현재는 1979년에 보수한 초가지붕의 이 사랑채만 남아 있다. 작은 사진은 신재효고택 안에 있는 동리가비(桐里歌碑). 신재효가 지은 동리가 등을 새겨놓은 비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구경 가세 구경 가세 도리화 구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희도 흴사 외얏꽃이’ 판소리 연구자이자 작가인 동리(桐里) 신재효(1812~84)가 자신이 각별한 애정과 정성을 다해 판소리를 가르친 최초의 여류명창 진채선을 위해 지은 판소리 단가 중 일부다. 신재효에게 진채선은 처음에는 판소리 제자였지만, 나중에는 사랑하는 마음 절절한 연인이 된 주인공이다. 이 노래는 사랑하지만 가까이할 수 없었던 진채선에 대한 마음을 담아낸 작품이다. 신재효와 진채선의 특별한 사랑 이야기다.

신재효 음률·가곡·판소리 대가
여성 소리꾼 진채선 제자로 삼아
경회루 낙성 기념잔치서 선보여

채선 노래에 매료된 흥선대원군
기생으로 3년간 궁궐 머물게 해

사제 초월한 사랑 깨달은 신재효
낙향 후 상심 달래려 ‘短歌’ 지어

◆판소리 스승과 제자로 만난 두 사람

신재효는 전북도 고창에서 태어났다. 중인 집안 출신으로 총명한 자질을 타고났다. 그는 어릴 적부터 학문에 열중하고 효심이 뛰어난 데다 언행이 모범적이어서, 주변에서는 큰 학자가 될 것으로 기대했다. 그런데 그는 학문뿐만 아니라 음률, 가곡, 판소리 등에도 정통했다. 이런 신재효는 타고난 음악감각과 창작능력, 판소리 음조의 기억력 등을 살려 많은 명창들과도 사귀고 그들을 도우면서 판소리 연구와 후원의 길로 본격적으로 들어서게 되었다. 당시 웬만한 명창들은 모두 신재효의 영향을 직간접으로 받았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진채선은 1847년에 고창군 심원면 월산리 검당포에서 태어나 무당인 어머니를 따라다니며 등 너머로 소리를 익혔다. 상당한 소리 실력을 갖추고 있다가 17세 때 신재효 문하로 들어가 소리 사범이던 명창 김세종으로부터 소리를 본격적으로 배웠다.

당시만 해도 판소리는 남성의 전유물이었는데, 진채선은 신재효와 소리 선생 김세종의 지도를 받아 판소리뿐만 아니라 가곡, 무용에도 능하게 되었다. 특히 판소리를 잘했는데, 미려하면서도 웅장한 성음과 다양한 기량으로 남자 명창들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다. 그녀는 특히 ‘심청가’와 ‘춘향가’를 잘 불렀다.

실력을 쌓은 진채선은 경복궁(경회루) 낙성 기념잔치에서 신재효가 지은 단가와 판소리 등을 부르게 되는데, 이는 두 사람의 사랑 행로를 크게 바꿔놓는다.

흥선대원군 이하응은 1867년 7월 경복궁 경회루를 새로 지어 낙성연을 베풀었다. 아들이 왕이 되기 전 가난한 왕족으로 불운한 세월을 보냈던 흥선대원군은 자신의 울분을 판소리 가락을 들으며 달래는 가운데 당대의 여러 명창들과 인연을 맺었다. 남달리 판소리를 즐기던 대원군은 경회루 낙성연에 전국의 명창들을 모두 불러들여 소리잔치를 벌인 것이다.

그때 초청된 명창들 틈에 진채선도 끼어 있었다. 신재효는 왕 앞에 나아가 노래를 하게 된, 아끼는 제자에게 고사창(告祀唱)을 작곡해주며 부르게 했다. 판소리를 부르기 전에 고사창을 부르게 한 것이다.

경회루 낙성연에 참여한 수십 명의 명창 중 진채선은 홍일점이었다. 누각 위 용상에는 임금과 왕비가 앉아있고, 한 단 아래에는 대원군을 중심으로 삼정승과 육판서 등 백관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경복궁 넓은 뜰에 많은 사람들이 운집해 있는 가운데 진채선은 스승이 지어준 고사창을 부르기 시작했다.

‘소중화 우리 조선 천하에 명국이라/ 백두산이 북주되고 한라산이 남안인데/ 망망한 대해수가 동서남을 둘러 있고/ 경복궁 주혈명당 천천세지 기업이오’

빼어난 소리뿐만 아니라 미모 또한 뛰어나 선녀가 노래하는 것 같았다. 진채선은 고사창에 이어 스승이 지어준 성조가(成造歌)와 방아타령, 판소리 춘향가 중 ‘사랑가’ 대목을 불렀고, 대원군을 비롯한 모든 청중의 넋을 잃게 만들었다. 이로써 진채선은 단번에 그 이름이 서울은 물론 전국에 널리 알려졌다.

◆운현궁으로 들어가 버린 진채선

진채선은 경회루 낙성연으로 대원군의 총애를 받게 되면서 그 후 운현궁에 살게 된다. 판소리를 좋아하던 대원군은 진채선이 마음에 들어 21세의 그녀를 궁으로 들여 같이 살게 한 것이다.

고창판소리박물관의 문화해설사는 진채선이 남장해서 경회루 낙성연에 나가 소리를 하고 소리에 반한 대원군의 눈에 들어 3일간 머물게 되었는데, 그때 남장을 한 것이 탄로가 나면서 대령(待令)기생으로 3년간 머물게 되었다는 설명을 들려줬다.

대원군은 뛰어난 명창 진채선의 뒤에는 신재효라는 훌륭한 판소리 이론 및 실기 선생이 있다는 사실을 진채선을 통해 알게 되고, 신재효를 운현궁으로 불러들여 소리를 듣기도 했다. 판소리에 관한 해박한 지식과 독특한 창법, 당당한 풍모와 인품에 감화된 대원군은 신재효에게 오위장(五衛將)이란 벼슬을 내려주었다.

신재효는 오위장 벼슬을 하고 대원군의 비호를 받으며 서울에서 잘 살 수 있게 되었지만, 갈수록 공허해지는 마음을 어찌할 수가 없었다. 진채선과 판소리를 함께하며 지내던 시절이 갈수록 그리워졌다. 꿈속에서도 진채선과 다정하게 마주 앉아 소리 공부를 하던 광경이 나타날 정도였다.

그러나 진채선은 이제 자신이 어떻게 할 수 있는 제자가 아니었다. 절대 권력자 대원군의 총애를 받는 귀한 신분이 된 것이다. 대원군의 귀여움을 받고 있는 진채선을 함부로 만날 수 없었다.

그렇게 되니 진채선에 대한 마음이 더욱 간절해졌다. 진채선은 단순히 뛰어난 제자가 아니었던 것이다. 사랑의 정이 깊었음을 새삼 확인한 그는 오위장 벼슬과 서울 생활을 내던지고 4개월 만에 고향으로 내려갔다. 그렇다고 사랑하는 마음이 사라지겠는가. 진채선을 향한 마음은 더욱 깊어졌다.

◆도리화가 지어 마음 달랜 신재효

신재효는 그런 마음을 조금이나마 달래기 위해 판소리 단가 ‘도리화가(桃李花歌)’를 지었다. 채선을 향한 마음을 담은 것이다. 서두 부분이다.

‘스물네 번 바람 불어 만화방창 봄이 되니/ 구경 가세 구경 가세 도리화 구경 가세/ 도화는 곱게 붉고 희도 흴사 외얏꽃이/ 향기 쫓는 세요충(細腰蟲)은 젓대 북이 따라가고/ 보기 좋은 범나비는 너픈너픈 날아든다// 붉은 꽃이 빛을 믿고 흰꽃을 조롱하여/ 풍전(風前)의 반만 웃고 향인(向人)하여 자랑하니/ 요요(夭夭)하고 작작(灼灼)하여 그 아니 경일런가/ 꽃 가운데 꽃이 피니 그 꽃이 무슨 꽃인고/ 웃음 웃고 말을 하니 수정궁의 해어환가// 해어화(解語花) 거동보소 아름답고 고울씨고/ 구름같은 머리털은 타마계 아닐런가/ 여덟팔자 나비눈썹 서귀인의 그림인가/ 작약(綽約)한 두살작은 편편행운(片片行雲) 부딪치고/ 이슬속의 붉은 앵도(櫻桃) 번소(樊素)의 입일런가’ 글·사진=김봉규기자 bgkim@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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