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일년과 같은 하루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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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03 07:49  |  수정 2017-04-03 07:49  |  발행일 2017-04-03 제18면
[박미영의 즐거운 글쓰기] 일년과 같은 하루가 있다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눈이 내리고 내렸네,/ 온 세상에, 세상 끝에서 끝까지 온 세상을 휩쓸었네./ 촛불은 책상 위에서 타고 있었네,/ 촛불은 타고 있었네.// 여름날 날벌레들이/ 불꽃을 향해 날아들 듯이/ 눈송이들이 안마당에서/ 창문틀 쪽으로 흩날렸네.// 눈보라는 유리창에/ 둥근 원과 화살의 모양을 그려 놓았네./ 책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그 불빛에 얼비친 천장의 비틀린 그림자/ 얽힌 팔, 얽힌 다리…/ 교차한 우리 운명의 그림자 같았네.// 조그만 두 개의 신발이/ 소리를 내며 마루 위에 떨어졌네./ 밀랍은 침실 촛대에서/ 눈물처럼 옷에 흘러내렸네.// 그리고 모든 것 눈의 농무 속에서/ 회색과 흰색으로 사라져갔네./ 책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한쪽 구석에서 바람이 촛불을 향해 불어대자/ 그 열기는/ 십자가 모양/ 천사처럼 양 날개를 들어 올렸네.// 2월 내내 눈보라 흩날렸네./ 그리고 쉴 새 없이/ 책상 위엔 촛불이 타고 있었네,/ 촛불이 타고 있었네.//’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소설 ‘닥터 지바고’ 중 유리 지바고의 시)

‘시여, 너의 명예를 걸고/ 맹세하며 목이 메어 마치는 내 말은/ 네가 달콤하고 낭랑한 포즈가 아니라/ 삼등 열차석과 함께하는 여름이고/ 노랫가락이 아니라 어느 한적한 변두리라는 것// 너는 무더운 5월의 얌스카야 뒷골목/ 먹구름이 더위에 신음하며/ 여기저기 빗방울을 풀어내리는/ 보로디노 전장 최전선 세바드린 야전 진지// 너는 큰소리로 울리는 후렴이 아니라/ 휘어지는 철길 따라 두 줄로 나뉘는 변두리/ 결국 역에서 집으로 스며드는/ 강한 인상에 놀라 입을 열지 못하는// 폭우들의 싹들이 무성한 포도넝쿨 속에서 흙물이 되더니/ 동 트기 전 이미 오래도록/ 각운 속으로 물거품을 튀기며/ 지붕 아래로 시구(詩句)를 내리니// 시여, 물받이 밑에, 빈 양은 양동이처럼/ 빈 구체적 일상의 진실들이 놓여질 때/ 그때에 흐름을 보전하고, 시여/ 종이가 놓여졌으니 ? 흘러들어라!’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시(詩)’)

‘유명하게 되는 것은 추하고/ 세상의 평가는 인간을 높여 주지 않는다/ 문서의 산을/ 쌓기보다는/ 원고를 아껴라// 창작이 지향하는 바는 몰아(沒我)이지/ 화제나 성공이/ 무지한 인간들의 입담에/ 오르내리게 되었을 때의 억울함이여// 살아라, 거짓 이름을 버리고 어느 날엔가 우주의 사랑을 끌어들여/ 미래가 부르는 소리를 듣는다/ 그것을 위해서 살아라// 사람들은 생생한 발자취를 따라/ 한 걸음씩 너의 길을 따라올 것이다/ 하지만 패배인가 아니면 승리인가/ 스스로 알려고는 하지 마라/ 그리고 자기도 물러서서는 안 된다/ 자기 개성을 끝까지 지키면서/ 그저 살아가라, 살아가라/ 살아가라, 마지막 그 순간까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 ‘유명해진다는 것’)

‘지바고’는 ‘살아 있는, 생생한’ 등의 뜻에서 파생된 말이라고 합니다. 러시아 혁명 전후의 격동기를 산 누구보다 삶과 창작 그리고 자유의지를 사랑한 작가의 내면을, 이미 이름을 지으면서 화가이자 음악가였던 부모는 예감했나 봅니다. <시인·작가콜로퀴엄 사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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