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교육] 원래 책 안 읽는 아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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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4-03 07:40  |  수정 2017-04-03 07:40  |  발행일 2017-04-03 제15면
[행복한 교육] 원래 책 안 읽는 아이
이금희 <대구 동문고 수석교사>

국어시간에는 일어서서 책을 읽었다. 번호 순서대로 읽기도 했고, 날짜와 같은 끝번호 학생들이 일어나 책을 읽기도 했다. 큰 소리로 읽는 아이도 있고, 들릴 듯 말 듯 작은 소리로 읽는 아이도 있고, 가끔은 손으로 짚어가며 읽는 아이도 있다. 한 페이지를 다 읽기도 했고, 가끔은 절반 정도 읽었을 때 “다음”하고 신호를 주면 그 다음 학생이 읽었다. 그렇게 읽는 것이 얼마나 효과적인지 별 생각은 없었다. 중고등학교 때 배운 대로 내 국어 수업에서도 그대로 반복하였다.

그러던 어느 봄날이었을 것이다. 순서가 된 학생이 일어나지 않았다. 기다려도 일어나지 않는다. 모두가 그 학생 쪽으로 고개를 돌려 쳐다보았을 때 짝꿍이 한 마디 말해준다. “선생님, 얘는….” 글자를 못 읽는 학생인가? 중3교실에 설마 한글을 못 읽는 학생이 있을 리 없는데. 왜 그러냐고 했더니 “얘는 원래 안 읽어요”하고 대답한다. 원래 책을 안 읽는다는 여학생은 얼굴까지 발개지며 고개를 책상으로 떨군다. 다가가서 물었다. “읽을 줄 아니?” 조용히 고개를 끄덕인다. “그래? 그럼 소리 내서 읽지 않아도 돼. 앉아서 읽어도 돼. 대신 다 읽으면 나에게 신호를 줘. 할 수 있겠니?” 그러자 그 학생은 나를 한 번 쳐다보고는 책으로 시선을 돌렸다. “자, 읽을 거니까 너희들도 같이 눈으로 읽어.” 내 신호에 맞춰 다른 아이들도 책으로 눈을 돌렸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다. 아주 조용한 책 읽기가 시작되었다. 내가 속말로 책을 다 읽을 즈음 그 학생이 나를 쳐다봤다. “잘 했다. 아주 잘 읽었어.” 그리고 다음 번호 학생이 일어서서 이어서 읽었다.

몇 달이 지난 뒤 다시 ‘원래 책을 안 읽는’ 여학생의 순서가 되었다. 평상시 수업 시간에 집중도 잘하고, 조용하지만 학습 능력에는 별 문제가 없는 학생이라는 것을 나는 알고 있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소리 내어 읽는 것은 힘든 듯했다. “소리 내서 안 읽어도 돼. 대신 일어서서 눈으로 읽어줄래?” 머뭇거리며 아이가 일어난다. 다시 조용한 책 읽기가 시작되었고, 우리는 각자 눈으로 책을 따라 읽었다.

또 시간이 흘러 그 ‘원래 책 안 읽는’ 여학생이 읽는 순서가 되었다. 아이의 표정은 밝았다. 나를 힐끔 쳐다본다. “소리 내어 읽어 볼래?” 아이는 난처하다는 눈짓을 보낸다. “그럼 안 들려도 돼, 대신 네 입을 움직여서 속말로 읽어 봐.” 아이가 입술을 움직여 책을 읽는다. 하지만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다른 아이들은 모두 조용히 귀를 기울이며 들리지 않는 그 소리에 맞춰 행과 행 사이로 눈을 옮긴다. “고맙다. 참 잘 읽는구나.”

20여 년 전의 이야기다. 내가 아직 초보 교사 딱지를 떼지 못했던 때, 국어 교육이 무엇을 가르치는 것인지도 모르고 내가 배운 대로 혹은 참고서의 내용대로 가르치던 때의 이야기다. 그래서 어떻게 되었느냐고?

겨울 초입이었을 것이다. ‘원래 책 안 읽는’ 여학생 차례가 되었다. 아이는 쭈볏거리며 일어서 나를 한 번 바라보았다. 그리고 아주 작은 소리로 책을 읽기 시작했다. 아주 낮은 목소리로 한 페이지를 다 읽더니 나를 보며 씩 웃었다. 반 아이들의 환호와 박수가 오래 이어졌다. 여학생의 어깨를 토닥여주었다. 그때 나도 누군가의 토닥거림을 받는 느낌이었다. 이금희 <대구 동문고 수석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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