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사람] 커피명가 안명규 대표

  • 박진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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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력 2017-03-21   |  발행일 2017-03-21 제29면   |  수정 2017-03-21
“대구 인구대비 커피 소비량·카페 한때 세계 1위 자치단체가 장점 살리지 못해…특화방법 찾아야”
20170321
안명규 커피명가 대표의 바람은 대구가 커피명장제도를 도입함으로써 커피도시로서의 위상을 찾는 것이다. 그가 커피를 추출하며 미소를 짓고 있다.

경주서 커피가게 인수해 시작
커피명가의 명은 名아니라 明
세상 밝게하는 빛의 역할 의미

중남미 학교설립 기금 지원
세계 커피산지 찾아 정보 교류
수입 10% 책 구입 꾸준히 연구
커피 도시 대구 명성 되찾고파


‘생각이 필요합니다. 생각을 갖고 싶습니다. 지금 내가 제일 외롭고 지쳐있습니다. 그래서…’

대구를 대표하는 커피브랜드 ‘커피명가’의 커피팩토리와 카페, 전시관, 커피제조 체험실이 있는 ‘라핀카’(La Finca·대구시 수성구 만촌동 421-12) 2층 ‘묵언공간’ 작은 칠판에 쓰인 글이다. 묵언공간에선 독서도 하고 음악도 듣고, 커피를 마시며 조용히 대화도 나눌 수 있다.

지난 16일 오후 라핀카에선 ‘요리하는 PD’로 알려진 KBS 이욱정 프로듀서가 50여명의 청중이 모인 가운데 ‘요리한다. 고로 인간이다’를 주제로 특강을 했다.

안명규 커피명가 대표(53)가 경영하는 라핀카에선 이처럼 두 달에 한 번 꼴로 명사초청 특강, 북콘서트, 영화제, 작은 음악회 등을 연다. 이날 참가비는 1만5천원, 행사에 따라 참가비는 다르지만 이 비용은 ‘행복한 커피’라는 이름으로 전액 중남미 커피산지 어린이들의 학교 겸 놀이터 설립을 위한 기금으로 적립된다.

안 대표는 과테말라, 콜롬비아, 엘살바도르 등 3곳에 이미 놀이터를 설립했다.

“중남미 커피산지엔 이주노동자가 많습니다. 그곳의 아이들은 정규과정의 교육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어요. 그래서 아이들을 위한 놀이터 겸 교육공간을 만들고 학용품 등을 지원하고 있습니다. 생두만 수입하고 나몰라라 할 순 없더라고요.”

그가 이런 따뜻한 마음을 가지게 된 저변에는 20대 초반 아버지를 잃고 가장이 되면서 직접 생활비와 등록금을 벌며 고학을 한 경험이 있다. 개인적으로 공정무역을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안 대표는 경주 출신으로 문화고를 졸업한 뒤 계명대 신학과를 1년쯤 다니다 그만두고 1987년 강원도에서 군복무를 마쳤다. ‘낙도 선생님’이 되는 게 꿈이었던 그가 어떻게 커피와 인연을 맺었을까.

“고교시절 사서 선생님께서 끓여준 원두커피를 마신 적이 있습니다. 믹스커피가 대부분이었던 때 처음 맛본 그 향기와 느낌을 잊을 수 없었지요. 전역 후 고교 은사님으로부터 커피제조방법을 익히다 88년 우연히 경주에서 ‘돌담집’이란 커피가게를 인수하게 됐습니다. 단 커피 한잔에 5천원으로 판매해야 한다는 조건을 달았지요. 당시 경주지역 특급호텔 커피가격이 750원 하던 때였는데 하루 2잔 정도 팔았습니다. 그때 고객이 오면 영혼이라도 팔아주겠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가 됐고 한 잔을 팔더라도 100잔 같이 임팩트가 있는 커피, 추억을 파는 커피전문점을 하겠다는 결심을 했지요.”

대한민국 커피 1세대 장인은 그렇게 탄생했다. 독학으로 커피 볶는 기술을 익힌 그는 다방이 주류였던 90년 경북대 후문 근처에 ‘커피명가(明家)’라는 커피전문점을 오픈했다. 이름 ‘명(名)’대신 밝을 ‘명(明)’을 쓴 건 ‘커피를 통해 세상을 밝게 하고 빛의 역할을 하겠다’는 의지의 발로였다. 커피값은 비쌌지만(1천원) 입소문을 타고 커피명가가 알려지기 시작했다. 92년 대구시 중구 삼덕1가로 커피명가(본점)를 옮긴 이후 로스팅 머신 개발(97년), 바리스타교육(2001년), 프랜차이즈사업(2007년) 등을 통해 지금까지 진화하고 있다. 현재 전국 40여개에 지점을 갖고 있다.

그는 커피 1세대 주자로서 사명감과 책임감을 갖고 커피에 문화와 스토리를 입히는 노력을 지속적으로 해왔다. 2011년 라핀카를 연 것도 같은 맥락이다. 1천652㎡(500평) 규모의 건자재 창고 건물을 인수, 리모델링해 커피공장, 커피박물관 및 전시관, 커피나무 온실, 생두창고 등을 만들었다. 온실에선 2천500주의 커피나무가 자라고 있다. 이곳에선 판옥선 크기만한 100년 넘은 브라질산 커피선별기도 볼 수 있다.

안 대표는 커피연구도 게을리하지 않는다. 1990년대엔 두 달에 한 번 일본의 커피명인 가라사와 가쓰오를 찾아가 커피제조법을 배웠다. ‘보는 게 스승’이라는 생각으로 1년에 한 번 유럽, 미국, 일본을 방문해 커피트렌드를 살핀다. 또 중남미, 아프리카, 아시아 등 커피산지를 찾아 약 2개월간 머물며 현지인들과 정보교류를 한다. 수입의 10%는 책을 구입한다는 자신과의 약속도 지키고 있다. 좋은 사진과 책이 있으면 반드시 구입하고 커피스토리와 관련한 여행지가 있으면 꼭 들른다.

“‘주전자 10년’이라는 말이 있어요. 커피를 추출하는 데만 10년 걸린다는 말이죠. 추출은 물인데 불과 땅도 알아야 합니다. 불은 볶는 기술이며, 땅은 산지예요. 전 물과 불을 거쳐 이제 땅 연구를 하고 있는 셈이죠. 내년이면 커피인생 30년입니다. 커피 관련 종사자가 대구에 1만명이 넘는 걸로 알고 있는데 사회적 책임감을 느낍니다.”

안 대표는 그 일환으로 2000년 한국스페셜티커피협회(SCAK) 초대 회장이 되면서 커피문화 확산에 기여한 바 있다. 그는 대구가 한때 커피의 도시라고 불릴 만큼 흥성했는데 지금은 그 명성이 빛이 바래 아쉬워했다.

“2000년대 초만 해도 대구는 인구대비 카페와 커피소비량이 세계 1위라고 할 만큼 대단했죠. 하지만 자치단체가 그런 장점을 살리지 못했어요. 지금은 강릉 등 다른 도시가 커피도시로 알려져 있죠. 대구가 커피로 특화할 수 있는 기회는 있습니다. 예컨대 요리, 제과제빵처럼 커피명장제도를 도입해 커피 전문인을 양성하고 기술력을 높이는 것입니다. 제가 기여할 수 있는 부분이 있다면 힘 닿는 데까지 해보겠습니다.”

글·사진=박진관기자 pajika@yeongnam.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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